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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 인물사- 춘포 출신 하경덕 박사
연희전문의 교수시절 수양동우회사건으로 검거
마스터 기자 / iksanpress@hanmail.net입력 : 2007년 07월 02일(월) 15:06
공유 : 트위터페이스북미투데이요즘에
1.혼란기를 헤쳐간 일생 하경덕(1897.6.26~1951.4) 선생은 사회학자, 교육자, 독립운동가, 언론인으로 살았던 분이다. 일제 강점기에는 연회전문에서 사회학 교수로 재직하였고, 광복 후에는 언론계에서 코리아 타임즈와 서울신문 사장, 합동통신 이사를 지냈고, 미군정치하의 남조선과도 입법위원을 역임했다.
 하경덕에 관해서는 기존의 연구도 몇 편 있지만 학계, 언론계, 해방 정국의 정계에서 활동한 경력이 합당한 평가를 받지는 못하고 있다. 이유는 그의 사회적 활동 기간이 어둡고 혼란스러운 역사적 격동기였기에 하경덕이라는 인물이 크게 부각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일제 군국주의가 위세를 떨치던 1931년부터 1945년 패망까지 연희전문의 교수로 재직하는 동안 수양동우회사건으로 검거되기도 했고, 1943년 에는 문과과장이 되었으나 교직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다.
 광복 후에는 언론과 정치의 전면에 나서기는 했으나 좌우익의 대립과 식민치하의 깊은 후유증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그의 역량을 펼쳐 보기 전에 좌절을 맛보아야 했고, 6.25전쟁이 일어난 후 50대 중반의 나이에 생을 마쳤다. 그가 오래 장수하여 천수를 누렸더라면 아마 학문상으로나 언론활동으로 더 큰 업적을 남겨놓을 수 있었을 것이다. 정치 외교적으로도 그는 국가를 위해 중요한 역할을 맡아 국가에 봉사할 기회를 얻었을지 모른다.
 국내 학자로서는 처음으로 사회학을 연구하여 박사학위를 받았고, 미국에서 그 의 저서가 출간될 정도의 수준에 이르렀으나 학자 또는 교육자로서의 업적도 한 동안 평가받지 못하고 학계에서 잊혀진 상태로 되어 있었다. 일제 시기에는 국내에 사회학이 학문의 영역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70년대에야 하경덕이라는 이름이 사회학계에서 알려지기 시작했고 그에 관한 연구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사회학자로서의 업적에 관해서는 이만감(李萬甲)의 '한국의 학보(學譜): 사회학 편' (1973.5.12~18)에 처음 소개된 후, 안계춘(安啓春)이 '우리나라 사회학의 선구자 하경덕' (1973)을 발표한 것이 하경덕을 본격적으로 다룬 논문이 발표되면서 하경덕은 우리나라 사회학의 선구자로 소개되었다.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하버드대학에서 박사하위를 받았으며, 일제 치하에 사회학을 강의하였다는 사실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언론인 하경덕’에 관한 연구 논문도 아주 드물다. 1976년에 임근수가 '신문평론'에 게재한 '안당(晏堂) 하경덕' 이라는 인물론과, 1992년에 대한언론인회가 발행한 '한국언론 인물사화' (1993)에 박성용이 쓴 인물론 정도가 그에 관한 연구 논문이다. 이 글에서는 기존의 연구에는 활용되지 않았던 그의 ‘이력서’와 미국의 생활을 추적할 수 있는 '신한민보' 기사를 통해 출생 이후부터 미국에서 보냈던 기간을 밝혀 보고자 한다. 귀국 후에는 당시의 신문기사와 관련 문서를 활용하여 그의 발자취를 실증적으로 재구성하고, ‘언론인 하경덕’에 초점을 맞추어 고찰해 보기로 하겠다.
2.출생부터 미국 유학까지
 유교와 기독교의 영향
 하경덕 선생은 1897년 6월 26일 전라북도 익산군 춘포면 대장촌에서 하경열(河慶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언론 역사의 관점에서 본다면 서재필 선생이 최초의 민간신문을 창간한 지 한 해 뒤가 된다. 하경덕의 가정은 그 지역에서 중류 이상의 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부친 하경열은 유학자로서 서당의 훈장도 지냈고, 기독교 신자로서 교회의 장로였다. 하경덕이 28살이었던 1925년 흥사단에 가입하면서 미국에서 작성한 ‘이력서’에는 아버지 하경덕의 직업이 ‘교사’로 기재되어 있는데, 서당의 훈장을 의미하는지, 근대식 교육기관의 교사를 지냈는지는 알 수 없다.
하경덕의 경력은 ‘이력서’에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다. 종교는 공자교(孔子敎:유교)와 예수교 장로파로 적었다. 이력서를 작성하던 1925년에 아버지 하경열의 나이가 50세였으므로, 1875년 생이고 어머니 金씨는 48세였다. 동생 극수(克秀)는 26세로 교사였다. 그의 가정환경이 유교의 전통을 지니면서도 기독교 사상과 서양문화에 개방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에는 기독교인이 그리 흔하지 않은 시적이었다.
하경?은 여섯 살이었던 1903년부터 11살까지 집안에서 한학을 공부하다가 1908년에 공립 보통학교에 입학하여 1911년에 졸업했다. 16살 때인 1913년 전주의 신흥(新興)학교[하경덕은 ‘신흥기독교학교’로 적었다]를 졸업한 후 평양의 숭실중학에 진학하여 1915년에 졸업했다. 숭실중학은 기독교 장로교 계통 학교로 1910년 이후 많은 졸업생을 미국에 보냈다. 하경덕은 서울 YMCA 영어과에서 1년간 공부한 후 1916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의 나이 19세였다. 하경덕은 가치관을 형성하던 어린 시절에는 유교적인 환경에서 자라면서 한학을 공부했고, 소년기에서 청년기로 접어드는 나이에는 서양 선교사들이 세운 미션 스쿨에서 공부한 후에 미국으로 건너갔던 것이다.
동제사 가입, 하버드대 박사
 하경덕은 중국의 상해를 거쳐 미국으로 가는 배를 탔다. 미국에 가는 경로는 통상 일본을 거치게 되지만 상해로 우회하여 가는 경우도 있었다. 그는 상해에서 독립운동 단체인 동제사(同濟社)에 가입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력서에 가입 단체를 동제사(상해)와 국민회(미주)로 적었는데 동제사는 1912년 상해에서 조직된 독립운동 단체를 1919년 상해 임시정부가 수립되기 전까지 상해 한국인의 중심 조직이었다. 상해에는 한국에서 망명한 독립운동가와 일본에서 건너온 한국인 유학생들이 많았다. 1911년 중국으로 망명한 신규식(申圭植)은 이들을 규합하여 동제사를 조직했는데, 표면으로는 상해 거류 한인의 상조기관처럼 활동했으나 실제 목적은 독립운동이었다. 이사장은 신규식, 총재 박은식(朴殷植)을 비롯하여 상해에 모인 독립운동가들이 이 회의 중견 간부들이었다. 회원은 300여 명에 달하였고, 구미각지에 사무실을 만들어 활동하였다.
 하경덕은 상해에서 ‘차이나호’를 타고 1916년 9월 30일 샌프란시스코에 상륙했다. 함께 미국에 입국한 남녀 학생은 26명이었다. 하경덕은 샌프란시스코와 로스엔젤스에서 2년간 고학을 하며 고등학교를 마쳤다. 1917년에는 미국 교포들이 ‘버클리 학생양성소’를 세워 기숙할 학생 13명을 모집했다. 이들에게는 기숙시설을 제공한다는 조건으로, 대학생 5명, 중학생 2명, 소학생 5명, 여학생 1명이 응모하였다. 이 가운데 하경덕은 대학생 5명 가운데 이름이 올라 있지만 이 때는 아직 대학에 진학한 학생은 아니었다. 신한민보는 하경덕이 캘리포니아대학 부속 버클리 중학교에서 1년 정도 열심히 공부하여 좋은 성적으로 1919년 6월에 졸업했다고 보도했다. 하경덕이 작성한‘이력서’는 같은 기간인 1918년부터 이듬해까지 ‘버클리중학 특학생(特學生)’이었던 것으로 기록하였는데, 캘리포니아대학 부속 버클리중학교의 장학금을 받았다는 뜻인 것 같다.
 중학교를 졸업한 후 2년간 노동을 하며 진학을 준비하여 1921년 9월 마침내 명문 하버드대학에 입학허가를 받았다. 이제 그는 동부의 보스톤으로 가서 하버드대학에 입학하여 1924년 초에는 문학과(文學科) 3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인접한 보스톤대학에는 후에 소설가가 되는 강용흘(姜鏞屹)이 공부하고 있었다. 1925년에 학부 과정을 마친 후 하경덕은 9월에 대학원에 입학하여 1928년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가 재학 중인 때에는 사회학과가 독립되지는 않았고, 현 사회학과의 전신인 사회윤리학과(Department of Social Ethics)에서 학위과정을 마쳤다. 하버드대학의 정규과정을 졸업한 최초의 한국인이다. 학위논문은 Social Laws: A Study on the Validity of Sociological Generalizations. 짧은 기간에 석사와 박사과정을 모두 마친 것으로 보아 그는 능역이 탁월하고 근면한 성격이었을 것이다. 학위를 받은 후에는 포스트 닥터의 자격으로 대학에 머물면서 연구조교를 잠시 근무하였다. 그러나 경제공황이 닥치면서 사정이 어렵게 되자 1929년에 귀국하였다. 학위논문은 귀국 후인 1930년에 '사회법칙(Socia Laws)'  (University of Northen California Press, Chapel Hill N.C.)이라는 제목으로 미국에서 출판되었다. 미국에서 그의 책이 출간되었다는 사실은 책의 가치가 학술적으로 높이 평가되었음을 의미한다.
안계춘은 하경덕의 사회학관은 다음 세 가지로 특징지을 수 있다고 말한다. 첫째 사회학을 모든 사회과학을 종합하는 학문으로 보았고, 둘째 모든 사회과학을 종합하는 데 있어서는 심리학적인 인과법칙이 토대가 되어야 한다고 보았으며, 셋째로 그의 사회적 방법론은 자연과학의 그것을 모델로 하여 정확하고 확실한 인과법칙의 발견을 이상으로 삼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 정진석 박사는△경남 거창출생△중앙대 영문학과, 서울대 신문대학과(석사) 영국 런던대 언론학박사△관훈클럽 사무국장△한국외국어대 신문방송학과 교수△한국외국어대 사회과학대학장△외국어대 정책과학대학원장△방송위원
마스터 기자  iksanpres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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