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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삿갓과 안동김씨 신파 - 정복규 본사사장
익산신문 기자 / iksanpress@hanmail.net입력 : 2010년 06월 07일(월)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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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시인 김삿갓으로 널리 알려진 김병연(金炳淵.1807-1863)은 안동김씨 신파의 후손이다. 순조 7년 경기도 양주에서 태어난 그의 자는 난고(蘭皐), 별호는 김삿갓 또는 김립(金笠)이다.
홍경래의 난은 그가 5살 되던 해에 일어났다. 1811년 순조 11년 평안도 지방에서 홍경래 등이 중심이 된 농민반란이 일어난 것이다. 당시 선천부사로 있던 그의 할아버지 김익순은 반란군에 항복한다. 이 일로 김병연의 집안은 멸문을 당한다.
어린 김병연은 집안이 멸족을 당하자 노복 김성수의 구원으로 형 김병하와 함께 황해도 곡산으로 피신한다. 후일 멸족에서 폐족으로 사면되어 형제는 어머니에게로 돌아갔다. 그러나 아버지 김안근은 홧병으로 죽었다.
어머니는 자식들이 폐족자로 멸시받는 것이 싫어서 강원도 영월에서 숨어 살았다. 그 뒤 김병연은 과거에 응시하여 급제를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자신의 집안 내력도 모른 채 홍경래의 난 때 투항했던 자신의 조부를 탄핵하고 조롱하는 시제를 택한 것이다.
‘논정가산충절사탄김익순죄통우천(論鄭嘉山忠節死嘆金益淳罪通于天)’이라는 그의 할아버지 김익순을 조롱하는 시제로 장원급제를 한 것이다. 그 뒤 그는 자신의 내력을 어머니에게서 듣게 된다. 김병연은 결국 조상을 욕되게 한 죄인이라는 자책과 폐족자에 대한 멸시 등으로 20세 무렵부터 처자식을 둔 채로 방랑의 길에 오른다.
그는 푸른 하늘을 볼 수 없는 죄인이라며 삿갓을 쓰고 죽장을 짚은 채 방랑생활을 시작한다. 금강산 유람을 시작으로 각지의 서당을 주로 순방하고, 4년 뒤에 일단 귀향하여 1년 남짓 묵었다.
이때 둘째 아들 김익균을 낳았다. 또다시 고향을 떠나서 서울, 충청도, 경상도로 돌았다. 도산서원 아랫마을 서당에서 몇 해 동안 훈장노릇도 하였다. 다시 전라도, 충청도, 평안도를 거쳐 어릴 때 자라던 곡산의 김성수 아들집에서 1년쯤 훈장노릇을 한다.
충청도 계룡산 밑에서, 찾아온 아들 익균을 만나 재워놓고 도망간다. 1년 만에 또 찾아온 그 아들과 경상도 어느 산촌에서 만났으나, 이번에는 심부름을 보내놓고 도망쳤다. 3년 뒤 경상도 진주 땅에서 또다시 아들을 만나 귀향을 마음먹었다가 또 변심하여 이번에는 용변을 핑계로 도피하였다.
57세 때 전라도 동복 땅에 쓰러져 있는 것을 어느 선비가 나귀에 태워 자기 집으로 데려가 거기에서 반년 가까이 신세를 졌다. 그 뒤 지리산을 두루 살펴보고 3년 만에 쇠약한 몸으로 그 선비 집에 되돌아와 한 많은 생애를 마쳤다. 뒤에 아들 익균이 유해를 강원도 영월군 의풍면 태백산 기슭에 묻었다.
김병연은 고뇌와 갈등을 거듭하면서 마침내 모든 욕망을 다 털어 버렸다. 바람처럼 구름처럼 한세상을 떠돌며 자연을 벗 삼아 살았다. 고독하고 처량한 외로운 인생을 살았다.
한편 안동김씨 신파의 시조 김선평(金宣平)은 고려 태조 때의 개국공신이다. 그는 신라 경순왕의 손자 김숙승을 시조로 하는 안동김씨 구파와는 본관만 같을 뿐 뿌리가 다르다.
김선평은 후삼국 시대에 안동의 성주였다. 이 안동 싸움에서 태조 왕건이 승리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들이 바로 김선평을 비롯 권행과 장길 등이다. 그 뒤 이들은 각각 안동김씨, 안동권씨, 안동장씨의 시조가 된다. 세 성씨는 이후 에도 계속 안동의 대표적인 성씨로 자리 잡는다.
김상헌은 병자호란 때 청나라와의 강화를 끝까지 반대하다가 심양에 잡혀가 6년간 유폐생활을 한다. 안동김씨 신파가 대표적인 벌족으로 성장한 것은 조선 후기 순종조 이후다. 11살 어린 나이로 순조가 즉위하게 되고 선왕 정조의 고명을 받은 김조순이 국정을 총괄하게 되면서 신 안동김씨의 50여 년 간 세도정치가 시작된 것이다.
김옥균은 갑신정변을 일으켜 수구파의 정부를 무너뜨리고 신정부를 조직했으나 청나라 주둔군의 방해로 3일 만에 실패한다. 그 뒤 일본으로 망명, 10년을 보내다 1894년 상해에서 홍종우에게 살해된다.
김좌진은 3.1운동 때 만주로 건너가 북로군정서를 조직하고 총사령관이 되었다. 1920년 일본군을 대파한 청산리 싸움은 너무나 유명하다. 김두한은 바로 그의 아들이다. 인구는 2000년 현재 47,702명이다.
익산신문 기자  iksanpres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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