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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용기와 남평문씨 - 정복규 본사사장
익산신문 기자 / iksanpress@hanmail.net입력 : 2010년 03월 15일(월) 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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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문용기 열사(文鏞祺,1878∼1919)는 전북 익산시 오산면 관음부락 출신으로 본관은 남평(南平)이다. 그는 익산시 오산면 남전리에 있는 남전교회에서 장로로 신앙생활을 했다. 만세운동을 주도한 남전교회는 1897년 10월에 세워졌다. 익산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다.
문용기는 전남 목포와 함경도 갑산 등지에서 독립운동과 계몽운동을 펼치다, 3.1운동이 벌어지자 귀향하여 만세운동을 주도하던 중 41세 나이로 순국했다. 현재 익산시 주현동 105-19번지에 있는 순국열사비는 그의 독립만세운동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워진 것이다. 이승만 전 대통령이 그의 비문을 썼다.
문용기는 24세 때 영명학교 한문교사로 부임한다. 그는 교사로 재직 중 1919년 4월 4일 이리 장날을 이용하여 일어난 독립운동을 주동했다. 당시 이리 지방에는 일본군 보병중대가 주둔하여 검문검색이 심했다.
따라서 만세운동을 계획하기가 매우 어려운 형편이었다. 그는 박도현, 장경춘 등 기독교 인사들과 몰래 만나 거사를 준비했다. 정해진 장날 정오경 이리 장터에는 기독교인 등 300여 군중이 모였다. 일제는 헌병과 보병부대 병력을 강화하여 이를 대비했다.
만세운동에 참여한 군중들은 문용기의 지휘에 의해 독립선언서를 나누어 가지고 태극기를 휘날리며 시가를 행진했다. 군중의 수가 점차 늘어 1천여 명이 되면서 기세가 올랐다. 그러자 일본 헌병대가 출동하여 이를 제지하려 했다. 그러나 시위 군중들은 이에 굴복하지 않았다. 일제는 보병부대까지 출동하여 제지했으나 시위 군중들은 더욱 큰 소리로 독립만세를 외쳤다.
일제는 이에 소방대와 일본인 농장원 수백명을 동원하여 창검과 총, 곤 봉, 갈구리를 휘두르며 무력으로 진압했다. 시위 군중이 이에 대항하여 계속 만세운동을 진행하자 급기야는 무차별 사격을 감행하여 사상자가 속출했다.
이 때 문용기는 의연히 오른손에 태극기를 들고 군중 앞으로 나아가 독립운동의 정당성과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는 연설을 했다. 그러자 일본 헌병이 칼을 휘둘러 그의 오른팔을 베어 태극기와 함께 땅에 떨어뜨렸다.
그는 쓰러지지 않고 다시 왼손으로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외치며 전진하자 일제는 왼팔마저 베어버렸다. 두 팔을 잃은 그는 계속 만세를 외쳤다. 일본 헌병은 끝내 추격하여 사정없이 난자했다. 그는 목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독립만세를 외치다가 끝내 순국한다.
한편 남평문씨(南平文氏)의 시조 문다성(文多省)은 신라 자비왕 때 공을 세워 남평백에 봉해졌다. 1세조는 고려 숙종 때 서북면지병마사를 지내고 남평군에 봉해진 문익(文翼)이다. 그래서 후손들이 남평을 본관으로 삼았다. 남평은 전남 나주시 남평면의 지명이다.
문익 은 고려 인종과 의종 때 명신인 문공유의 아버지이며 문극겸의 할아버지다. 남평문씨는 문익 의 아들 문공인, 문공원, 문가관, 문공유 등 4형제가 크게 현달하면서 가문이 번성하기 시작한다. 그 후손에서 문극겸, 문유필, 문익점, 문달한 등이 배출됐다.
문극겸은 문공유의 아들로 큰아버지 문공인의 음직으로 관직에 나갔다. 좌정언으로 있을 때 환관들을 탄핵하다가 좌천되기도 했다. 정중부가 중심이 된 무인정변으로 무인정권이 들어선 후에 다시 벼슬길에 나선다. 그가 무인정변에서 화를 면하고 재상에까지 오를 수 있었던 것은 무인과의 인척관계 덕분이다.
문극겸은 이린 을 사위로 삼았다. 이린 은 무인정권 집권자 중의 한 사람인 이의방의 동생이다. 그런 까닭에 명종 3년 김보당의 반란을 계기로 많은 문신이 주살될 때 그의 일족은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이린 은 바로 이성계의 6대조가 된다. 문극겸은 명종 4년 이의방이 피살된 후에도 계속 관직에 남아 벼슬을 지냈다.
문득준은 원종 때 한림학사로 있을 때 삼별초 토벌에 참가했다. 그의 현손(玄孫)인 문익점은 공민왕 때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금수품이던 목화씨를 가져왔다. 장인인 정천익이 3년 만에 재배에 성공하여 의복혁명을 일으킨다. 문익점의 손자인 문래 는 목화에서 실을 뽑는‘물레’를 만들었다. 조선시대에 모두 139명의 과거 급제자를 배출했다. 인구는 2000년 현재 380,530명이 있다.
( 성씨 전문기자 )
익산신문 기자  iksanpres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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