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 김도영 원광대 한중관계연구원 연구교수 | | ⓒ 익산신문 |
최근 LG가의 파양소송소식을 접하면서 떠오른 것은 해남윤씨가 윤두서의 삶이다.
공재 윤두서(恭齋 尹斗緖, 1668-1715)는 남인계열로 숙종시대에 가문의 정치적 좌절로 회재불우의 삶을 살다간 선비화가이다.
윤두서는 그 뛰어난 천재적 자질을 갖추고도 자신의 포부와 야망을 현실세계에서 실현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의 예술혼이 불타는 <자화상>(國寶 제240호)으로 인해 그가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입신양명을 죽어서야 이룩했다.
해남윤씨가를 조선후기 예술가문으로 반석의 위치에 올려놨을 뿐 아니라, 조선후기 미술사에서 윤두서를 거론하지 않고는 미술사를 논할 수 없을 정도도 지대한 영향력을 확보했다.
이제 윤두서의 <자화상>에 대한 극찬은 각설하고, 윤씨가의 양자 입적은 어찌보면 LG가와 닮아있어, 이 글을 쓴다. 공재는 출생 직후 할아버지 고산 윤선도에 의해 바로 해남윤씨가의 종손으로 입양된다.
때문에 그에게는 친부·친모와 양부·양모가 있다. 여기서 그의 양모에 대한 공재의 행동양식은 사실 연구자들이 주목하지 못했다.
기실 윤두서는 양모 때문에 48세에 죽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윤두서가 왜 양모 때문에 죽었는가? 그것은 양모가 양자로 입적한 양아들 공재를 학대하거나 양자입적과 동시에 공재가 윤씨가로부터 물려받은 엄청난 경제자산을 빼앗고자 양모가 그의 죽음을 사주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공재가 자신의 건강을 돌보지 않을 정도로 양모를 너무나 극진히 모셨고, 아들이 없던 양모는 입적한 양아들의 극진한 보살핌을 받으며 천수를 누렸다.
급기야는 1712년 양모의 장례에 가산을 너무 많이 사용할 정도로, 종손이자 양아들로써 윤두서가 할 수 있는 극효(極孝)를 하다가 사망한 것이다.
양자 윤두서는 장례비 과다지출로 인해 한양에서의 생활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었다.
그래서 1713년 46세에 수많은 가솔들과 가구, 그리고 애서가 윤두서가 한양에서 청나라로부터 수입한 약 3천여종의 서적과 문서 등을 짊어지고 해남으로 이사하는 낙향을 결행한 것이다.
한양에서 땅끝마을 해남까지 긴 이사여정에서 분실된 서적과 문서, 파손된 살림 등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양모의 호화장례를 치루고, 낙향후 1년만인 1715년 겹친 과로로 면역력이 약해져 어처구니없게도 감기로 사망한 것이다
숙종시대를 살다간 양아들 윤두서처럼 장례에 가산을 탕진하고 자신의 건강까지 헤쳐 결국 죽음을 불러온 ‘극효(極孝)’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하지만 LG가의 원래 후계자 구원모로부터 상속받은 그 천문학적 자산과 경영권승계라는 세세곡절의 과정에 그 은혜의 소종래를 조금이라도 알아차리기를 바람이다.
내가 지금 누리고 있는 이 자리와 富, 그 ‘은혜의 소종래(所從來)’가 어디서 왔는가를... 1994년 눈에 넣어도 안 아플 19세 외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그 피맺힌 절규를...
그리고 10년뒤 2004년 죽은 아들을 가슴에 묻고 양모는 남편의 조카(26세)를 아들로 입적해 가슴으로 품었다. 그리고 그후 22년간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필자는 알기도 어렵고 알고 싶지도 않다.
17세기 윤두서와 21세기 구광모의 양어머니는 똑같이 조카를 양아들로 입적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서로 이렇게 다르다.
윤두서의 양모는 양자 윤두서 때문에 40여년간 건강하고 행복하게 82세까지 천수를 누렸다.
구광모의 양모는 양자 구광모 때문에 20여년간 건강하게 장수를 누리며 행복한가? 권력과 돈의 힘으로 움직인다는 재판, 현재 승소할 수는 있다.
하지만 SK이혼소송에서 왜 전 국민은 노소영 편이 되어가는지를 생각해 볼 때이다.
LG파양소송이 기각이라지만, 전 국민의 마음은 여전히 애처로운 양모 김영식에 닿아 있음을 구광모가 알아차릴 수 있을까? 사람들은 모두가 자기 입장만 얘기한다. 그래서인지 易地思之가 더 소중한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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