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왼쪽부터 박하균·강달룡·박내홍 선생. | | ⓒ 익산신문 | |
국가보훈부는 6·10만세운동을 계획하고 주도한 박하균, 강달룡, 박내홍 선생을 2026년 6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습니다.
6·10만세운동은 1926년 6월 10일, 순종황제 장례일을 계기로 3·1운동 이후 다시 전개된 대규모 항일독립운동입니다.
특히 사회주의계, 민족주의계, 천도교계, 학생계가 함께한 연대의 독립운동이었습니다. 이 흐름은 이후 신간회 창립의 중요한 기반이 되었고, 학생들이 항일운동의 중심 세력으로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또한 이러한 정신은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으로 이어졌습니다.
박하균 선생(1902~미상)은 1919년 함흥과 홍원의 3·1운동에 참여해 옥고를 치렀습니다. 이후 연희전문학교 재학 중 조선학생과학연구회에서 활동하며 6·10만세운동 준비의 핵심 역할을 맡았습니다.
선생은 격문과 태극기를 제작·배포하고 시위를 이끌어 징역 1년 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출옥 후에도 항일 출판물을 배포하며 독립운동을 이어갔습니다.
강달룡 선생(1888~1940)은 진주 3·1운동을 주도해 3년 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습니다. 이후에도 노동운동, 농민운동, 사회주의 운동에 참여하며 노동자와 농민, 백정 등 사회적 약자의 권익 향상에 힘썼습니다.
또한 조선공산당 책임 비서로 활동하며 천도교, 민족주의 세력과 협력해 6·10만세운동을 준비했습니다. 선생은 독립이라는 공동의 목표 아래 민족협동전선을 모색했습니다.
박내홍 선생(1894~1928)은 천도교 청년운동을 이끈 독립운동가입니다.
선생은 천도교 청년세대가 종교운동을 넘어 사회운동과 민족운동으로 나아가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또한 천도교청년동맹 대표위원으로서 6·10만세운동 준비 과정에서 격문 인쇄와 지방 연락을 담당했습니다. 비록 사전에 발각되어 계획은 무산되었지만, 전국적 봉기를 준비하며 독립운동에 힘썼습니다. 이후에는 신간회 창립에도 발기인으로 참여했습니다.
정부는 애국지사들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박하균 선생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강달룡, 박내홍 선생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각각 추서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