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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훈부는 일제의 민족차별에 맞서 한국인 노동자들의 열악한 노동환경 개선을 위해 헌신한 이재유, 김사국, 강주룡 선생을 ‘2026년 5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습니다.
이재유 선생(1905~1944)은 도쿄 유학 중 노동운동에 참여하며 한국인 노동자 단체 조직과 민족 독립, 노동권 신장을 모색했습니다. 이후 서울에서 경성트로이카를 조직하고 노동자·농민 단체 조직, 독서회를 통한 학생운동지도 등 독립의 기반을 조성하기 위한 다양한 항일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이재유 선생은 반복된 체포와 옥고에도 전향을 거부하다가 1944년 청주보호교도소에서 순국했습니다.
김사국 선생(1895~1926)은 1919년 한성정부 수립을 위한 조선국민대회를 준비하다 검거되어 복역했습니다. 출옥 후에는 활발하게 청년운동에 참여하고, 일본을 오가며 노동운동 단체를 조직하고 민족의 단결을 강조했습니다.
또한 간도에서 대성중학교 부설 동양학원을 설립하고, 일제의 탄압을 피해 만주 닝구타로 이동해 대동학원을 세우는 등 민족교육에도 힘썼습니다. 그러던 1924년 건강이 악화되어 귀국한 뒤 3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강주룡 선생(1901~1932)은 평양의 평원고무공장에서 노동자로 일하던 중 1931년 한국인 노동자의 임금 인하에 반발한 파업 과정에서 ‘을미대 지붕투쟁’을 벌이며 노동자의 권리를 외쳤습니다. 이 투쟁은 노동자들의 연대와 대중의 공감을 이끌어내며 사회적 관심을 모았습니다.
이후 강주룡 선생은 평양 노동조합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감옥에서 투쟁을 이어갔습니다. 그러나 건강이 악화되어 병보석으로 풀려난 뒤 3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당시 한국인 노동자들은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에 시달렸습니다. 여기에 일제의 식민지적 억압과 수탈, 민족 차별까지 더해져 이중, 삼중의 어려움에 놓여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노동운동은 단순한 생존권 투쟁을 넘어 일제에 저항하고 민족 독립을 향해 나아가는 투쟁으로 발전했습니다.
이재유, 김사국, 강주룡 선생은 노동운동과 동시에 독립과 민족해방을 위해 적극적으로 투쟁했습니다. 이들의 항일노동운동은 사회 전반의 변화를 추구하는 민족운동으로 이어졌고, 현대 노동운동의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정부는 애국지사들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이재유 선생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김사국 선생과 강주룡 선생에게 각각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습니다.
이재유(1905~1944) 독립장(2006), 김사국(1895~1926) 애족장(2002), 강주룡(1901~1932) 애족장(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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