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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윤병화 원광대 연구교수. | | ⓒ 익산신문 | 최근 천만 관객을 돌파하며 흥행을 이어가고 있는 영화 ‘왕과 사는 남자’는 단종과 엄흥도를 중심에 둔 작품이다.
그동안 단종을 다룬 영화와 드라마는 대개 계유정난과 왕위 찬탈, 사육신의 충절 등 굵직한 역사적 사건을 축으로 극의 서사를 전개해왔다.
그러나 이번 작품은 결이 다르다. 권력의 중심에서 밀려난 뒤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강원도 영월 청령포에 머물러야 했던 마지막 시간을 그리고 있다. 그리고 그 마지막을 지켰던 엄흥도라는 인물을 통해 관객은 한 임금의 비극을 몸소 체험해 볼 수 있다.
조선 제6대 임금 단종은 조선 역사상 정통성을 온전히 갖춘 군주였으나, 계유정난 이후 폐위되어 영월로 유배되었다.
유배지 청령포는 삼면이 강으로 둘러싸여 있고, 나머지 한 면은 절벽으로 막혀 있어 육지 속 작은 섬과도 같은 지형이다.
나룻배가 없으면 드나들 수 없는 곳으로 빼어난 자연의 아름다움과는 달리 철저한 고립의 공간이었다.
그곳에서 단종은 밤마다 한양의 궁궐과 정순왕후, 자신을 따르던 신하들을 떠올리며 슬픔에 잠겼다.
이때 등장한 인물이 바로 영월의 호장 엄흥도다. 어느 깊은 밤 청령포에서 애끓는 울음소리가 들리자 엄흥도는 강을 건너 단종을 찾아갔다.
“이 심야에 웬 사람이 나를 찾는가”라는 물음에 “영월 호장 엄흥도이옵니다”라고 답하자, 단종은 그를 보며 “이곳에서 너를 보니 육신(六臣)과 상봉한 것 같구나”라고 말한다.
이는 임금이 신하에게 건넨 말이라기보다 고립된 어린 임금이 처음 만난 위로자에게 털어놓는 절절한 고백에 가깝다.
엄흥도는 이후에도 문안을 드리며 그의 곁을 지켰다. 하지만 그해 큰 장마로 단종은 청령포에서 관풍헌으로 거처를 옮겼고, 객사 동편에 있는 자규루(子規樓)에 올라 자규시를 읊으면서 지냈다.
이러한 상황에서 결국 그는 세조의 명으로 생을 마감하였다. 단종의 죽음 이후 엄흥도의 행적은 다음 기록을 통해 전해진다.
‘홍재전서(弘齋全書)’에 따르면 “엄흥도가 혼자서 임곡(臨哭)하고는 이튿날 어머니를 위하여 마련해 두었던 옻칠한 관을 가져다 영월군 서북쪽 동을지산으로 단종의 시신을 모시고 서둘러 매장하였다.
이때 엄흥도는 ‘좋은 일을 할 따름이다’라고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단순한 의례가 아니라 목숨을 내건 결단이었다. 그의 충절은 훗날 공조판서로 추봉되고 충의공이라는 시호를 받으며 기려졌다.
또한 단종의 유배길도 영화 속에서 중요한 장면으로 등장한다. 실제로 한양을 떠나 영월에 이르기까지의 길은 통곡, 충절, 인륜의 길이었다.
오늘날 영월군은 이 유배길을 역사문화공간으로 조성하였다. 솔치재를 넘어 어음정에서 물을 마셨다는 이야기, 역골 주변의 주막에서 하룻밤을 보냈다는 전승은 고단한 여정을 생생히 전한다.
영월 주천의 느티나무 아래에서 쉬던 단종에게 노인이 샘터의 물을 진상했고 이곳에는 현재 단종의 동상이 세워져 있으며, 이는 저 멀리 한양을 바라보는 모습이다. 군등치는 임금이 올랐다 하여 붙은 이름이며, 방울재는 단종의 말방울이 떨어진 데서 유래한다.
배일치재에서는 한양의 궁궐이 있는 서쪽을 향해 큰 절을 올렸다고 하며, 옥녀봉은 한양에 두고 온 정순왕후를 떠올리며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이들 지명 하나하나에는 한 임금의 감정이 켜켜이 겹쳐 있다. 단종 유배길은 그가 느꼈던 상실과 회한의 장소이자, 그를 기억하는 영월군민의 연민이 응축된 공간이다.
영화 ‘왕과 사는 남자’가 큰 사랑을 받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우리는 이미 단종의 비극적 결말을 알고 있다.
그러나 영월에 살았던 엄흥도라는 인물을 통해 그 비극은 다시 사람의 이야기로 되살아났다. 외로운 임금의 곁을 지키며 끝까지 예를 다한 한 사람의 선택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마지막으로 엄흥도가 남긴 “위선피화(爲善被禍) 오소감심(吾所甘心)”은 ‘선한 일을 하다 화를 입더라도 달게 받겠다’라는 뜻이다.
지금처럼 세상이 어지럽고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에 그가 남긴 이 글귀를 삶의 지표를 삼는 이가 있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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