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 유은미 호원대학교 공연미디어학부 교수 | | ⓒ 익산신문 |
수능의 아침은 늘 유난히 춥다. 내가 수험생이던 그날도 그랬다. 이른 새벽, 든든히 아침을 먹고 엄마가 정성스레 싸준 따끈한 보온 도시락을 들고 아빠와 함께 시험장으로 향했다.
손끝으로 전해지는 온기는 그날의 긴장 속에서 유일하게 마음을 풀어주는 위로 같았다. “오늘만큼은 잘 되길.” 가족의 마음이 도시락에 그대로 담겨 있었다.
시험장에 들어서자 긴장이 서서히 올라왔다.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선물 받은 초콜릿을 하나 꺼내 먹었다. 달콤함이 주는 안정감에 잠시 기대했었지만 곧 나른함이 밀려왔다.
그 초콜릿에 아주 소량의 알코올이 들어 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것은 시험이 모두 끝난 뒤였다. 지금은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지만, 당시엔 그런 여유조차 없었다.
오전 시험이 끝나고 점심을 먹은 뒤 오후 시험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그때 저질렀다. 답안지 마킹을 한 줄 밀려서 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발견한 것이다.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부랴부랴 감독관에게 답안지 교체를 요청했지만, 마감 10분 전이라 교체는 불가능하다는 차가운 사실만 돌아왔다. 펜을 쥔 손은 떨렸고, 마음속에서는 무언가가 와르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이어진 영어 듣기평가에서는 집중조차 제대로 되지 않았다. 결국 그날의 수능은 눈물과 함께 끝이 났다.
밖에서 기다리던 아빠는 내 표정을 보고도 아무것도 묻지 않으셨다. 그저 말없이 앞만 보며 운전을 하셨고, 말없는 위로가 오히려 더 깊게 마음을 건드렸다.
집에 도착하니 엄마가 준비한 따뜻한 밥상이 차려져 있었다. “시험 잘 봤냐”는 엄마의 물음에 나는 솔직하게 대답할 수 없었다. 숨기기 힘든 표정, 가라앉은 목소리, 무거운 분위기. 그날의 식탁 위에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여러 감정들이 함께 앉아 있었다.
그때 엄마가 조용히 말했다. “재수는 없다.”
그 말은 이상할 만큼 따뜻했다. 실패를 짚어내고 다그치는 대신, 그 실패를 더 이상 확대하지 않겠다는 선언 같았다.
‘인생을 수능 한 번으로 규정하지 않겠다’는 한 부모의 확고한 태도였다. 그 말 한마디에 마음속 응어리가 스르륵 풀렸다. 나는 더 이상 ‘한 번의 시험’에 매달려 흔들리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을 처음 느꼈다.
결국 나는 재수를 택하지 않았다. 기대보다 낮은 성적이었지만, 인생의 방향을 억지로 바꾸는 대신 지금의 나에게 허락된 선택지 안에서 길을 정했다. 대학 선택의 기준도 단순했다. 내가 머물 수 있는 친척이 어디에 있느냐, 그게 가장 중요한 고려 요소였다.
지금 돌이켜보면 다소 무모한 선택처럼 보일지 몰라도, 인생의 방향을 결정하는 기준이 꼭 ‘성적’이 아니어도 된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았다.
수능이 끝난 뒤의 시간들은 오히려 더 자유로웠다. 어른들이 주신 용돈에 들떠 웃고, 오래 참고 견뎌온 시간을 향해 스스로 박수쳤다.
수능이 인생의 끝인 줄 알았던 마음이 조금씩 부드럽게 풀려갔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하나의 진실을 깨달았다. 수능은 인생의 출발점 중 하나일 뿐이며, 단 한 번의 시험이 내 가능성을 규정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오늘 이 글을 읽을 수험생들에게도 그 말을 전하고 싶다.
여러분의 오늘이 어쩌면 실수로 가득했을 수도 있고, 마음대로 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혹은 기대만큼의 성적을 얻지 못할 것 같아 두려움이 앞설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모든 순간을 지나도, 여러분의 가능성은 여전히 펼쳐져 있다.
하루의 시험으로 인생 전체가 정해지지 않는다. 인생은 여러분이 앞으로 선택하고 만들어갈 시간들이 훨씬 더 많고, 훨씬 더 넓고, 훨씬 더 찬란하다.
수능 한 번으로 가능성이 가둘 수 없다는 사실은 내가 직접 겪었기에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오늘 수능을 치른 모든 이들에게 전한다. 정말 고생 많았다.
그리고 지금부터 시작될 여러분의 여정이 더 넓고 더 밝기를 진심으로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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