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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는 전북 김제 출신으로 1894년 전라도에서 구국을 위한 동학농민혁명이 발발하자 그는 동학군을 이끌던 전봉준(全琫準)을 방문해 혁명군을 이끌고 서울로 진격해 민씨정권을 전복하고 새로운 국헌을 제정해 나라를 구할 것을 제의했습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그는 구국의 열정에 불타는 청년들을 교육시켜 국권을 회복하는 길이 현 상황에서 최선이라고 생각해 한성사범학교의 교관이 돼 후진을 양성했습니다.
또한 1906년에는 장지연(張志淵)·박은식(朴殷植) 등과 함께 애국계몽단체인 대한자강회를 조직해 사회계몽운동을 전개했습니다.
1907년 3월 25일, 그는 동지들과 각기 지정한 장소에서 박제순·권중현 등을 처단하기 위해 대기했으나 상호 연락미비와 계획차질로 단지 권중현에게만 가벼운 총상을 입혔을 뿐이었으며 재차 거사를 시도했지만 붙잡히고 말았습니다.
이후에도 서울에서 호남학회를 세워 애국계몽운동을 활발히 전개하던 중 1909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6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습니다.
장태수는 식년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해 전적 예조정랑(禮曹正郞) 지평정언 장령을 역임했습니다. 1895년 단발령이 내리자 이를 반대하며 사직했습니다.
그 후 중추원 의관을 거쳐 시종원 부경에 올랐으며 1910년 8월 일본헌병이 그를 회유하기 위해 은사금을 전달하자 이를 거절했습니다.
일본헌병대가 세 아들을 잡아 가고 그도 체포하려 하자 단식을 결행해 선조의 묘에 죽음을 고하고 24일만에 절명 순국했습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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