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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화로 미래는 문화가 국경으로"
익산신문 기자 / ikpress@naver.com 입력 : 2009년 10월 19일(월)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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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익산신문 | | 백제는 익산으로 천도한 사실이 결코 없었을까. 결단코 있었다. 최근 백제의 익산천도를 기정사실화한 발표로 관심을 끌었던 최완규 마백문화연구소 소장(54?원광대 사학과 교수). 백제사 연구에 한 획을 그었던 그는 삼국유사 삼국사기에는 천도사실이 구체적으로 명시하고 있진 않으나 자세히 보면 있다고 상황을 정리한다. 최 소장의 도발은 이 뿐 아니다. 요즘 잔뜩 물이 올랐던 익산문화유산의 '세계문화유산 등재' 움직임 역시 그가 이미 2006년부터 주창했던 결과물에 다름 아니다. 지난 13일 최 소장을 만나 익산의 역사적 정체성은 물론이고 그동안 회자됐던 문화계 이슈들을 진단해본다.
-익산천도 관련 도발적인 말씀을 하셨다.
"그런가? 절대 그렇지 않다. 거꾸로 생각해보면 금방 알 수 있는 일이다. 컨텍스트 즉 상황을 들여다보자. 삼국사기를 기록한 유학자 김부식은 '묘청의난'을 진압한 인물이다. '묘청'은 고구려 진보세력으로 서경천도를 주창했던 사람이다. 이를 이해하면 백제의 '익산천도'에 대한 김부식의 사관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또 여러 정황으로 보건대 익산 천도가 합의에 의해 이뤄지지 않았을 것이고, 이를 금기시했을 법하다. 이런 배경으로 '익산천도'를 구체적으로 싣지 않았을 것으로 본다."
-좀 더 구체적으로 소개해달라.
"예를 들어보자. 무왕의 릉이 익산에 있다. 백제왕릉은 모두 능산리에 있잖은가. 왜 유독 무왕만 이쪽에 있는지 의문을 가질 법하다. 미뤄 짐작컨대 왕국 간에도 의견차가 있었던 것 같다. 속담에 '족보 파버린다'는 식으로 말이다. 삼국사기에는 누락됐지만 이런 배경들이 숨어있는 것이다."
-강단사학이 이런 점을 왜 간과했나.
"백제사 연구자들의 인식이 빈약한 결과다. '삼국사기'를 원사이드하게 본 것이 부른 착오 아니겠는가. 삼국사기는 왕실과 수도중심으로 쓰여진 책이다. 상호관계 속에서 봐야는데 그렇지 못했던 결과들이다. 문제는 또 있다. 이런 내용이 삼국유사나 삼국사기에 나오지 않는 점을 이상하게 생각했어야 한다. 그럼에도 이를 간과한 것이다."
-삼국사기 내용을 풀어 설명하신다면.
"일단 삼국사기 법왕조 '창왕흥사' 대목을 들춰보자. '창왕흥사, 어시도사비성(創王興寺, 於時都泗比(삼수변比)城)'은 왕흥사 창건 당시 수도는 사비성이었다는 기록이다. 삼국사기 무왕조는 좀 다른 기록을 보여준다. 다른 왕대가 '중수궁실(重修宮室)'로 사용했던 말과 달리 '중수사비지궁(重修泗比(삼수변比)之宮)'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는 당시 수도가 다른 곳이었기 때문에 굳이 '사비성'을 지목해 표기했음으로 분석할 수 있다. 이런 차원에서 익산천도를 사실로 보는 것이다."
-여기서 '왕흥사'는 어떤 의미를 갖고 있나.
"결론적으로 말해 '왕흥사'는 '미륵사지'를 말한다. 법왕이 불안한 정국을 수습하고 왕권강화를 위해 마한의 고도인 익산천도계획을 은밀하게 추진한 결과물에 다름 아니다. 이때 지나칠 정도로의 살생을 금한 것도 이런 정황을 입증해준다. 결국 무왕대에 천도가 이뤄지고, 의자왕이 다시 사비로 환도한 점은 왕실내의 많은 갈등을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
-홍사준도 왕흥사와 미륵사지가 같다는 주장을 편 바 있다.
"사실 577년에 완성된 '부여 왕흥사'는 위덕왕이 아들의 죽음을 슬퍼해 세운 절이다. 이 절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의 법왕 2년에 나오는 '왕흥사'와는 다르다. 당시 상황을 참작컨대 이를 미륵사지로 보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1970년대 중반 홍사준의 주장과 같으나 관점은 다르다. 홍사준이 단지 왕흥사가 미륵사지라는 차원에서 머물렀다면, 이 경우는 익산의 백제왕도설로 영역이 크게 확장되는 셈이다."
-삼국사기 법왕조의 금살생 대목도 좀 더 살펴봐야 할 것 같은데.
"맞다. 고기를 잡지 말라는 수준에서 나아가 어구도 태워버리라고 강요했다. 이는 모이지 말라는 얘기였고, 은밀하게 천도를 준비한 배경으로 볼 수 있다. 말하자면 종교 이데올로기, 율령통치와 같은 개념이었다."
-당시 시대상황은.
"위덕왕 이후 혜왕은 물론이고 법햿도 1년 밖에 통치하지 못했다. 정국불안이 최고조에 달했을 것이다. 법왕은 이를 수습하기 위해 마한이남으로 천도계획을 세웠을 것이고, 당시 토착세력인 마한을 껴안지 않으면 안됐다. 무왕대 들어 천도계획이 실행된 셈이다. 이를 반증해주는 증거물들이 바로 미륵사지, 왕궁성, 미륵산성, 쌍릉이다."
-익산의 정체성을 정리하신다면.
"익산의 정체성은 뭐니 뭐니해도 마한과 백제사에서 찾아봐야 한다. 기원전 1세기경 고조선 준왕이 내려와 최고의 철기문화를 받아들여 꽃피운 지역이다. 금강유역인 입점리와 웅포리는 백제중심문화를 수용해 백제 왕도로 성장시키기도 했다. 익산은 물론이고 고창 정읍지역을 발굴하면서 보니까 마한분묘가 많이 조사됐다. 이는 마한의 세력이 미륵산에서 모악산까지 펼쳐져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세계문화유산 얘기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은데.
"2006년부터 등재시켜야 한다고 외치고 다녔다. 그땐 콧방귀도 뀌지 않던 사람들이 이제라도 변화된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하지만 진정성을 가지고 접근해야 한다. 1970년대 중반 쌀 생산하겠다고 야산 개발한 적이 있다. 지금 와서 평가가 어떤가. 남아도는 쌀이 대수가 아니잖은가. 환경과 자연유산을 파괴한 결과로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와 있지 않은가. 불과 몇 년 전 일이다. 미래가치에 대해선 심사숙고하지 않으면 안된다. 눈앞에 있는 것이 다가 아니잖은가. 제발 진정성을 가지고 임해줬으면 좋겠다."
-미래가치는 십분 공감한다.
"로마나 그리스 등 선진국을 봐라. 문화가 절대불변의 가치라는 것을 보여주지 않는가. 2006년부터 세계문화유산 하자고 입이 부르트도록 부르짖었다. 이는 개인의 꿈이 아니라 집단의 꿈이다. 10년 20년 후 가치는 뭐냐. 공장이 문제가 아니다. 민족의 가치가 바로 전통문화를 잘 가꾸고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 아닌가. 결국 정통성으로 승부하는 것이다. 이를 주목해야 한다."
-혹 문제점을 지적할 만한 사례가 있나.
"금마농공단지를 보자. 유적 유물이 걸리지 않으나 경관문제가 있잖은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가 됐을 경우 세계인들이 몰려와 농공단지를 봤을 때 우리의 천박한 문화인식을 얼마나 비웃겠는가. 진정성을 갖고 본질에 접근하는 것이 중요하다."
-익산이 가야할 길이라면.
"익산의 주산업은 보석가공이다. 이 역시 문화다. 문화유산과 만났을 때 시너지는 엄청나다. 미래가치는 마땅히 글로벌화되므로 장벽도 국경도 없다. 조만간 문화가 국경인 시대가 올 것이다. 리더들이 이를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 허나 이들에게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는다. 진정으로 문화가 발전되고 이를 피드백할 생각이 없으니 그저 정치쇼일 뿐이다. 깨어있는 한 사람으로 미래가치를 예민하게 고민하고 싶다."
-미륵사지유물전시관의 국박 승격문제는 어떻게 보시는지.
"그 또한 마찬가지다. 가까운 예로 국립전주박물관과 전주역사박물관을 비교해보라. 전주를 위해 더 많이 연구하고 일하는 기관이 어딘가. 세 살배기 아이라도 역사박물관을 꼽을 것이다. 국박에 지역을 연구하는 사람이 한명이라도 있는가. 저들끼리 가고 있는 것이다. 혹연 생긴다 해도 지역의 발전은 차치하고 장차는 국박 내부문제가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마다.
"문화가 지천거리가 돼 있다. 유물전시관도 도하고 시하고 핑퐁게임 하는 거 아닌가. 리더들의 교육이 잘못된 탓이다. 더불어 살줄 모르고 이기는 데만 초점이 맞춰져 진정성이 있을 리 없다. 지방자치를 왜 하나. 문화도 공유하는 시대다. 시대적 요구는 구슬을 닦고 꿰야 하는 것이다."
/글=김영애?사진=김유진 기자
<최 소장이 꼽는 익산 왕도문화 정체성>
◇마한의 고도 익산
최 소장이 익산의 왕도문화를 거론하면서 가장 먼저 꼽는 것이 '마한의 고도'. B.C 3세기~B.C 1세기경의 마한조 분묘유적이 집중돼 있는 사실은 이를 입증해주는 사례에 다름 아니다.
최 소장은 이 무렵 위만에게 쫓겨난 고조선 준왕(準王)이 남하해 정착했으며 철기문화 등을 들여와 한강이남 문화를 선도했다고 소개한다. 이로 인해 경제력 증가는 물론 강력한 무기체계도 보유하게 됐다고 덧붙인다.
최 소장이 또 하나 주목하는 것은 '공간적 범위'. 북쪽으로는 금강을 경계로, 남으론 모악산에 이르는 광범위한 공간도 마한의 당시 세력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최 소장은 또 백제 영역화 후에도 마한전통이 사라지지 않았던 점을 상기시키면서 이는 마한 고도의 주민으로서 마한문화 자존심을 지킨 것이라고 소개한다.
입점리나 웅포리 등 금강하구유역은 백제와의 지리적 요충지며 백제중앙문화를 수용한 곳으로 정리한다.
◇백제 왕도의 익산
익산은 과연 백제의 왕도였을까? 이 문제는 사실 의견이 분분하다. 허나 최 소장은 이미 제석사터에서 나온 '관세음응험기'는 직접적으로 익산 천도사실을 보여주고 있고, 삼국유사나 삼국사기도 잘 들여다보면 그런 내용들이 기록돼 있다고 전한다.
말하자면 행간 뒤에 숨어있는 상황을 읽어내야 한다는 것. 삼국유사 법왕조는 어구도 모두 태워버리고 물고기도 잡아먹지 말라고 '금살생'을 명한다. 이는 '천도준비를 위한 배경'이라는 평가.
또 삼국사기 법왕조와 무왕조의 '왕흥사'를 들어 이를 설명한다. 왕흥사는 곧 미륵사라는 주장. 법왕조에 따르면 왕흥사 창건당시 수도는 사비성이었다는 분석이고, 무왕조는 완성당시 수도가 익산이었기 때문에 굳이 사비성을 거론했다는 논리다.
이는 다른 왕대에는 '중수궁실(重修宮室)'로만 쓰던 것을 '사비성'이라고 직접 거론한 것은 그런 배경에 따른 것이라고 최 소장은 정리한다.
최 소장은 이어 익산이 왕도였다는 사실은 궁궐(왕궁성)과 사찰(미륵사지 등), 성곽(미륵산성 외 다수), 능묘(쌍릉) 등 고대 국가경영의 4대 요건을 잘 갖추고 있다는 점도 이를 반증한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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