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 정성수 시인 | | ⓒ 익산신문 |
추석이 다가오면 형제들과 함께 조상의 묘를 찾아 벌초한다. 여름의 기세가 한풀 꺾였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따가운 햇볕 아래 풀을 베는 일은 고된 노동이다.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땀을 닦으며 문득 생각에 잠긴다. 지금은 조상의 은덕을 되새기며 벌초를 하지만, 앞으로 몇 십 년이 지나면 누가 이 일을 이어갈까?
형제자매는 이미 고향을 떠났고, 자식들마저 도시에서 바쁘게 살아간다. 먹고살기 바쁜 세상에서 조상을 기리기 위해 시간을 내어 벌초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는지?
희망은 막막하다. 벌초는 단순한 노동이 아니다. 시간과 체력, 마음의 여유가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현대 사회는 점점 그 여유를 허락하지 않는다.
가족의 형태는 핵가족화되고, 세대 간의 물리적 거리도 멀어졌다. 조상을 향한 마음은 여전하지만, 그 마음을 표현할 방식은 점점 달라지고 있다.
이러한 현실에서 장례문화는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전통적 매장에서 벗어나 화장, 수목장, 봉안당 등 다양한 방식으로 전환되고 있다. 이는 유행이 아니라 시대의 흐름이다.
도시화가 급속히 진행되면서 묘지를 위한 공간 확보가 어려워졌고, 경제적인 부담도 커졌다. 손바닥만 한 땅에 묘가 차지하는 면적은 부담스러운 존재가 되어가고 있다. 특히 젊은 세대는 실용성과 환경을 고려한 방식에 더 관심을 보인다.
무엇보다 묘지 관리의 어려움은 커지고 있다. 벌초는 기본이고, 묘비 보수, 주변 정리 등 지속적인 관리가 필요하다. 하지만 고령화와 가족 구조의 변화로 인해 이러한 관리는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실제로 지방의 묘지들은 관리되지 않은 채 방치되는 경우가 많고, 이는 환경적인 문제로도 이어진다. 산림 훼손은 물론 야생동물 서식지 침범 등 부작용도 무시할 수 없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새로운 장례문화가 주목받고 있다. 서울 근교의 한 수목장 공원은 최근 몇 년 사이 이용자가 급증했다. 자연 친화적인 방식으로 고인을 모시며, 가족들이 산책하듯 방문할 수 있는 공간으로 조성되어 있다.
벌초가 필요 없고, 관리도 전문 인력이 맡아주니 유족들의 부담이 크게 줄었다. 무엇보다 자연 속에서 고인을 기억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고 있다. 죽음 이후에도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방식은 생태적 가치까지 담고 있다.
또 다른 사례로, 김 모 씨는 부모님의 묘를 화장 후 봉안당에 모셨다. 그는 ‘처음엔 전통을 따르지 못하는 것 같아 죄송했지만, 봉안당을 방문할 때마다 부모님과 더 가까이 있는 느낌이 든다’고 했다.
그는 명절마다 가족과 함께 봉안당을 찾아 기도하고, 근처에서 식사하며 부모님을 추억한다. 벌초 대신 대화와 기억을 나누는 방식으로 조상을 기리는 것이다. 이는 편리함을 넘어, 정서적 연결을 더욱 깊게 만드는 방식이기도 하다.
이제 우리는 장례문화를 다시 생각해야 할 시점에 와 있다. 조상을 기리는 마음은 변하지 않지만, 방식은 시대에 맞게 변화해야 한다. 화장, 수목장, 봉안당 등은 단순히 편리함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지속 가능한 삶의 방식으로 나아가는 길이다.
전통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현실과 괴리된다면 오히려 의미가 퇴색될 수 있다.
벌초하지 않는다는 것은 전통의 단절이 아니라, 새로운 전통의 시작이다. 조상에 대한 존경은 형식이 아니라 마음에서 비롯된다.
이제는 부담이 아닌, 공감과 기억으로 이어지는 추모의 시대가 열려야 한다. 그리고 새로운 기억의 문화를 만들어가야 한다. 이제, 벌초 시대는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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