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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공고생을 바꾼건 네분의 멘토"
익산신문 기자 / ikpress@naver.com 입력 : 2009년 09월 28일(월) 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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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익산신문 | | <윤 원장이 걸어온 길>
1993. 3 ~ 1997. 2 아산재단 서울중앙병원 레지던트 수료
1997. 3 ~ 1998. 2 아산재단 서울중앙병원 전임의
1998. 3 ~ 1999. 2 원광대학교 의과대학병원 전임의
1998. 7 ~ 1998. 9 일본 쿠마모토, 쯔쿠바, 가나자와대학 단기방문
2001. 7 ~ 2001. 8 캐나다 토론토대학 단기방문
1999. 3 ~ 2008. 3 원광대학교 의과대학 조교수
2008. 4 ~ 현재 익산병원 영상의학과
<주요활동>
대한방사선의학회 회원
대한복부방사선과학연구회
회원 대한자기공명영상학회 회원
대한초음파학회 회원
대한간암연구회 회원
북미방사선의학회(RSNA) 회원
미국초음파학회(AIUM) 회원
유해중금속 비파괴검사장비 개발
나노미터 관찰 현미경 공동개발
익산방사선 영상과학연구소 소장
세계 인명사전 등재
윤권하 익산병원 부원장(49). 도처에서 많은 이들이 그를 들먹였으나 정작 귓전으로 들어오게 한 것은 이한수 익산시장의 찬사였다. "지역에서 볼 수 없는 훌륭한 인사"라는 이 시장의 강조점에 뭔가 모를 강력한 메시지가 느껴졌던 연유다. 역시나 그는 '안철수 KAIST 교수'에 견줄만한 힘이 있었다. 병원균을 초기에 진단할 수 있는 'X-선 광학현미경'도 그렇고 산업용으로 사업다각화가 가능한 'X-선 형광분석기'도 놀라움을 감출 수 없게 했다. 이 모두 세계적인 기술로 상품화되면 수출도 가능한 터였다. 22일 오전 그를 만나 그가 사는 법을 들어봤다.
-홍보용 사진과 많이 다르다.
"아, 그런가. 최근 6개월 동안 살을 7㎏ 뺐더니 그럴 것이다(웃음). 아무튼 더 멋져 보인다면 좋은 일이다(역시 웃음)."
-최근 많은 일을 하셨다.
"뭐 그저 열심히 살았다. 방사선과 의사를 하면서 현재 기술로는 늘 부족하다 생각했었다. 실제 방사선과 업무의 핵심은 조기 진단이다. 수㎝ 수㎜로 내려왔으나 아직도 한계가 많은 게 현실이다. 병은 세포 분자단위의 변화고, 진단이 가능하면 예방이 되는 것 아닌가. 이런 생각을 추구하다보니 유익한 결과들이 나타난 셈이다."
-최근 성과중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이라면.
"두 가지 정도로 요약된다. X-선 광학현미경'과 'X-선 형광분석기'다. 현미경은 세포 하나도 파괴하지 않고 내부구조를 50나노의 고해상도 관찰이 가능하다. 나노스케일의 영상을 고해상도로 얻으면 인체진단에 있어 새로운 세상이 열리게 된다. 'X-선 형광분석기'는 산업용으로 활용 여지가 많다. 반도체 LCD 기판검사장비로 또 자동차·전자부품의 중금속 함유량이나 내부함유량을 파괴하지 않고 검사할 수 있음은 물론이다."
-대단한 신기술인 것 같다.
"그간 외국장비만 있었는데 국산화에 성공한 셈이다. 거기다 신기술을 동원해 외산보다 성능이 아주 우수해졌고, 세계 최고수준이다."
-이런 장비를 개발하게 된 동기는.
"2001년 원대 조교수 시절로 거슬러간다. 수업중이었는데 송천은 당시 총장이 잠시 다녀가라고 전화를 해오셨다. 일본에서 온 주부대 남바 교수와 면담중이셨는데 그 자리서 남바 교수가 X-레이 기술 응용을 제안했다. 일본의 인공위성 프로젝트에 탑재할 X-선 망원경을 개발중이었고 의료용 활용을 검토해달라는 부탁이었다. 2주 동안 고민해도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송 총장은 다시한번 불러 평생 오지 않을 기회가 될 수도 있다며 더 많은 생각을 주문했다. 그 와중에 생각이 미친 게 X-선 현미경이었다. 말하자면 망원경의 역발상이었던 셈이다. 멀리 있는 걸 당겨보는 것이 아니라 작은 것을 당겨보는 현미경이 퍼뜩 떠올랐다."
-이후로도 쉽지 않은 과정이 있었을 것 같다.
"물론이다. 분자세포 영상에 접목시켜야겠다는 개념을 세우고 아이디어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남바 교수에 메일도 보냈다. 그러면서 디자인이나 체계화가 가능했고, 메일로 주고받으며 틀을 잡혔다. 실행하기까지는 또 인력 장비가 필요해 산자부를 방문했다. 황당해하고 뜬구름 잡지 마라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가능성을 평가해준 사람이 있었다. 국가 R&D평가위49개 과제중 4개안에 선정돼 모든 게 순조로웠다."
-총장께서 요청했을 정도라면 그에 이르기까지 배경이 있을 것 같은데.
"글쎄, 오래 전부터 관심을 뒀기 때문일 것이다. 1995년 서울 아산병원 전임의 과정으로 있을 때 미국학회서 발표기회가 있었다. 전 세계 의료기기 연관산업 전문가그룹 4~5만명이 모였는데, 당시로선 참여만으로도 획기적인 일이었다. 그때 느낀 것이 아무리 좋은 논문을 발표해도 우리나라는 외국회사들 제품을 검증해주는데 지나지 않았다. 우리의 경우 의료서비스는 질이 높은데 기기나 제약분야는 아직도 제로수준 아닌가. 외국회사 선전만 해주고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돌아오면서 우리 손으로 우리 기기를 만들겠다고 벼르기 시작했다. 아마도 그 영향이 아니었을까 싶다."
-사업 관련 에피소드가 있다면.
"2005년 50나노 현미경 영상의 첫 이미지가 나온 날을 결코 잊을 수 없다. 마땅히 나올 것으로 확신하고 일본 나고야 학술회의에 발표를 의뢰했다. 아뿔싸, 다음날 새벽 5시 출발해야 하는데 도무지 보이질 않았다. 당일 새벽 1시쯤 이미지가 나타났고 연구원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결국 세계최초라는 타이틀에 걸맞게 당당하게 발표했고, 참가자들은 대한민국을 다시 봤다고 한마디씩 했다. 정말 감격적인 순간이었다."
-고생이 많으셨을 것 같다.
"죽다 살다했다. 연구원들도 매일 날 새는 게 태반이었다. 해 뜨는 거 보고 겨우 사우나 가서 한숨 자면 다시 10시쯤 출근해서 또 연구하고…."
-첫 인상이 굉장히 소시민적이다.
"아무래도 어려서부터 어렵게 살았던 연유일 것이다. 그래도 후배 연구원들은 어렵다고 무섭다고 말하곤 한다. 사실 연구원들과는 어려운 대목이 없잖다. 개인의 행복을 위해서라도 큰 그림을 그려주고 몰입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다. 그럴 법도 한 것이 머리를 맞대고 비전을 찾아야 하고 더불어 책임을 다해야하기 때문이다."
-편안하게 잘 하실 것 같은데.
"지천명인데도 갈등을 많이 한다. 하고 있는 일이 옳은지, 처음 시작한 꿈이 그리고 추진하는 일이 옳은지 등등. 빠르게 이뤘으면 좋겠는데 연관기관과 조율도 해야 하고…. 혼자 하는 일 같으면 밤샘이라도 하면 되는데…. 방법론 목표에 대해 고민하고 연구원들을 가족처럼 배려하면서 성과를 내게 하는 것도 쉽지 않다."
-어렸을 때 꿈은.
"뭐가 되겠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다. 아마도 살아온 길이 평범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강진중 졸업후 집안이 갑자기 어려워졌다. 학교에서 수석을 놓치지 않았는데 뾰족한 수가 없었다. 담임선생님의 권유로 경북 구미 금오공고로 가게 됐다. 이게 함정인 셈이었다. 공부는 안하고 땜질이나 기계 속 들여다보는 게 일이었다. 그래 많이 방황했다."
-이후 과정이 궁금하다.
"국방부와 문교부 장학금으로 운영되고 있으니 졸업하고는 곧바로 하사관으로 입대했다. 5년간 복무하면서도 고민이 적잖았다. 제대 전부터 대입을 준비해 1984년 연대 경제학과에 입학한다. 당시 얼마나 학생운동이 치열했나. 학생운동에 잠시 몸담았으나 개인적인 야망과 상충돼 빠져나왔다. 이후 지도교수 권유로 원광대 의대에 진학한 게 오늘에 이른다."
-당시 지도교수에 대한 얘길 종종 하시는 것으로 안다.
"그렇다. 소영일 교수셨는데 내 인생의 몇 분 안되는 멘토시다. 한 시간 정도 들으셨던 선생은 사회현실에 관심있고, 세상에 기여도 해야겠고, 개인적으로 주저앉아 있고 싶지도 않고 능력이 있으니 의과대학이 안성맞춤이라고 권하셨는데 첨엔 좀 당황했다.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생경함 때문으로 결국 학업 중단하고 학원으로 갔다. 이후 공부만하면 됐으니까 개인적인 고민도 씻은 듯이 사라졌다."
-멘토를 몇분 꼽으셨던 것 같다.
"아, 맞다. 소 교수님을 비롯 내 인생엔 몇 분의 멘토가 계신다. 오영호 전 서울아산병원 병원장, 송천은 전 원대 총장, 또 익산병원 이사장이셨던 김재백 박사도 내겐 중요한 분이셨다. 그 분들 은혜로 지금의 내가 있는 것이다."
-휴식은 어떤 식으로.
"책을 많이 읽는 편이다. 평전이나 역사책도 자주 보지만 특히 자서전을 선호한다. 진솔한 얘기도 그렇지만 극한 상황의 대처요령에 대해 생각거리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최근에 읽은 작품으로는 이희호 여사의 '동행'과 장영희 교수의 수필집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 등이 기억에 남는다.
-그 많은 일을 하시자면 시간을 쪼개 쓰셔야할 것 같은데.
"예전에는 수면시간을 줄이기도 했는데, 요즘엔 충분히 잔다. 그래야 창조적인 생각을 할 수 있는 연유다. 장점이라면 짧은 시간에 집중해서 마무리를 잘 한다는 점이다. 뭐든 한번 잡으면 정확하고 빠르게 해내는 편이다."
-해보고 싶은 일은.
"별다른 것은 없고 하고 있는 일을 잘 마무리했으면 한다. 원래 계획대로 잘 이뤄져서 우리 손으로 만든 방사선 의료기기가 전 세계 사람들에 의해 쓰이고 의료복지에 이용돼 함께 행복해지면 좋겠다."
-마지막으로 한마디.
"사는 곳이 고향 아닌가. 벌써 16년 살았으니 햇수는 태어나 소년기를 보낸 강진과 비슷하다. 모쪼록 익산 나아가 전북이 잘 살았으면 좋겠다. 혁신 일으키는 사람으로 개인적인 미션을 갖고 있다. 서울대서도 초빙하겠다고 했지만 안 가고 남는 것은 익산이 잘됐으면 하는 바람에서 기인한다. 시장 상황과 잘 연계해 상품을 개발하고 수출까지 하면서 지역의 경쟁력을 일으키는데 기여하고 싶다."
<취재를 마치며>
윤 원장은 의사다운 권위는 없었다. 허나 휴머니티는 그득했다. 환자들을 대할 땐 친절하고 공손했고, 연구원들에겐 엄격한 절도가 느껴졌다.
무엇보다 기여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그의 미션이 몹시 인상적이었다. 이 세상에 온 이상 많은 사람들이 행복할 수 있도록 한 몸 바치겠다는 단단한 결기를 투사한 셈이었다. 호를 짓게 되면 '익산(益山)'이라고 하고 싶다는 것은 그 반증.
전남 강진에서 태어나 경북 구미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강원도 원주에서 군복무를 마친 뒤 원광대와 인연을 맺었으니 그는 전국구다. 허나 '익산'에서 살면서 '익산'의 발전을 논하고 나아가 전북, 대한민국의 진보를 추구하는 그는 익산인이라 해도 손색없다. 아니 익산에 이런 글로벌한 인재가 있다는 사실에 우리가 행복해 해야 할 것 같다.
/김영애 기자 yo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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