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 한승진 황등중 교사 | | ⓒ 익산신문 |
사람은 다른 사람과 잇대어 살아가는 존재이다. 한자로 사람을 ‘인(人)’이라고 하는데 그 의미도 두 사람이 잇대어 있는 모양이라고 말한다.
그러니 요즘은 IQ(지능지수)보다도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원만히 형성해 가는 능력을 말하는 SQ(Social Quality)가 중요한 덕목으로 꼽힌다.
이에 대한 에리히 프롬의 말이 생각난다. “바람직한 사람됨은 다른 사람과 건강하게 상생하며 생산적으로 결합되어야 한다.”
여기서 프롬이 말하는 ‘생산적’이라는 말은 각자가 자발적으로 자신의 잠재능력을 실현해 가는 것을 말한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미워하고, 험담하고, 비난하는 데 지나치게 많은 힘을 허비한다. 이러다 보니 결국 사람과의 사귐이 건강하지 못하고 지극히 피상적인 사귐에 따른 벽을 만들어가게 되는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스스로 고독감과 무력감으로 괴로워하게 된다. 그러니 다른 사람과의 사귐을 건강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차가운 마음의 벽을 녹여내는 자기개방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요즘 학교에서 인성교육의 중요 덕목으로 배려를 가르친다. 배려는 ‘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있다는 상대방의 세계를 인정하는 것이다.
문득 떠오른 다산 정약용의 인품을 짐작하게 하는 이야기이다. 한번은 다산이 가난한 집 아낙네가 오랜 병고로 고생하는 것을 보고는 정성을 다해 치료해 준 적이 있었다.
아낙네는 궁핍한 형편에 딱히 감사한 마음을 전할 길이 없어, 고심 끝에 달걀 한 꾸러미를 전하였다.
그런데 다산은 외출 중이라 아들이 이를 받아 두었다. 다산은 아들에게 전해 듣고는 그것을 장에 가서 팔면 그 집의 한 달 양식은 될 터이니 돌려주라고 호통을 쳤다.
이에 아들이 그것을 돌려주려고 할 때, 황급히 다시 아들을 불렀다. 그러고는 이렇게 말했다. “한 알은 받아 두어라. 아무리 가난해도 인사 차릴 자존심마저 저버릴 수야 있겠느냐.”
다산은 가난한 사람의 자존심을 지혜롭게 살려주는 배려를 잊지 않은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다른 사람과 고운 사귐을 갖는 것이 생각보다 힘든 일은 아니다.
논어에 나오는 구절이다. ‘기소불욕 물시어인(己所不欲 勿施於人)’, ‘내가 하고자 하지 않는 바를 남에게 베풀지 말라’는 뜻으로 다른 사람의 자존심을 인정해 주는 것에서 그 실마리를 찾아야 할 것이다.
나보다 다른 사람을 존귀하게 여기는 자세가 중요하다. 이를 ‘역지사지(易地思之)’라고 한다.
영어로는 언더스탠드(understand)라고 한다. 이 말은 ‘under’와 ‘stand’가 합쳐져서 된 말이다. under는 “~아래에, ~밑에”라는 뜻이고, stand는“어디에 서 있다”라는 말이다. 그러니까 합쳐서 “~아래나 ~밑에 서 있다”는 말이다.
이 단어는 사람 사귐에 있어 다른 사람보다 밑에 혹은 아래에 서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단어의 뜻이 ‘이해하다’는 말이 된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을 이해하려면 다른 사람 밑에 서 있어야 한다. 만약 다른 사람을 이해하려면 밑으로 내려가야 된다. 이렇게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 있다.
다른 사람 밑에 서지 않으면 이해를 못 한다. 오해를 하게 된다. 그러니 다른 사람의 자리나 입장에 서 보게 될 때, 겸손이 나오게 된다. 겸손이란 자기를 낮추는 사람의 모습이다.
대학 시절 은사이신 고 신영복 선생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없는 사람이 살기는 겨울보다 여름이 낫다고 하지만 교도소의 우리들은 없이 살기는 더합니다만 차라리 겨울을 택합니다. 왜냐하면 여름 징역은 자기의 바로 옆 사람을 단지 37도의 열덩이로만 느끼게 합니다.
이것은 옆 사람의 체온으로 추위를 이겨 나가는 겨울철의 원시적우정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형벌입니다. 자기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을 미워한다는 사실, 자기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으로부터 미움을 받는다는 사실은 매우 불행한 일입니다.
더욱이 그 미움의 원인이 자신의 고의적인 소행에서 여유된 것이 아니고 자신의 존재 그 자체 때문이라는 사실은 그 불행을 매우 절망적인 것으로 만듭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 자신을 불행하게 하는 것은 우리가 미워하는 대상이 이성적으로 옳게 파악되지 못하는 말초 감각에 의하여 그릇되게 파악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알면서도 증오의 감정과 대상을 바로잡지 못하고 있다는 자기혐오에 있습니다.”
필자가 참 좋아하는 도종환의 ‘담쟁이’이라는 시가 생각난다. 이 시를 통해 힘들고 지쳐 쓰러지는 아픔 속에서도 함께해 줄 사람으로 인해 일어서는 힘과 용기를 깨닫게 된다. 그리고 참된 어울림을 생각해 본다.
‘벽(壁)’은 집이나 방 따위의 둘레를 막는 수직 건축물이다. 그 기능은 분명 하나를 둘로 나누고 단절시키는 차가움을 의미한다. 이 벽은 아무리 강하고 단단해도 생명이 없다.
그러나 이 벽을 타고 올라가는 담쟁이는 생명이 있다. 생명이 없는 것은 생명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바로 이 담쟁이덩굴은 심장 모양의 잎을 달고 있고 생명이 숨 쉬고 있다.
사람 사귐이 서로 담쟁이 잎이 되어 서로 어우러질 때 벽을 허물어뜨릴 것이다. 이렇게 될 때 우리는 서로가 부둥켜안고 어우러지는 기쁨의 사귐을 이룰 것이다.
다름을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면서도 존중하고 수평적 소통의 사귐을 가질 수 있음이 오늘 우리에게 꼭 필요한 삶의 자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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