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 한승진 황등중 교사rn | | ⓒ 익산신문 |
이 말은 물에다 얼굴을 비추지 말고 사람에게 자신을 비추어 보라는 말로 거울에 얼굴을 비추어, 나타난 자신의 겉모습에 집착하지 말고 사람들에게 자신을 비춰보면서 내면을 성찰하라는 말이다.
물에 얼굴을 비추지 말라는 경구는 물을 거울로 삼던 시대의 이야기이다. 모름지기 사람에게 비추어 봐야 한다.
사람들 속에 자신을 세우고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키워 가야 한다. 다른 사람을 존귀하게 여기고 나보다 남을 높게 여기는 마음, 그런 마음으로 나와 남을, 틀림이 아닌 다양성으로 이해하여 남을 인정하고 남에게서 배우려는 마음가짐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자기 모습을 돌아보고 살피는 일이 생각만큼 쉽지 않다.
우리 사회의 이른바 ‘지도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이라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기억을 조작하는 것으로, 필요한 것 혹은 자신을 중심에 놓고 볼 때 믿고 싶은 것만을 기억한다. 사실, 혹은 진실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손쉽게 조작된 기억력은 지도자들에게는 매우 달콤한 함정이다.
귀보다는 입이 앞서 나가는가 보다. 듣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다음에 무슨 말을 할 것인지 메모하거나 생각하는 중인 경우가 많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려 재빨리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곤 한다.
물론, 편리하게 맞춰진 기억들과 함께 자신의 업적을 부풀리는 일은 결코 잊지 않는 것이 지도자들이 쉽게 빠지는 함정이다.
어떤 형태이건 ‘힘’에 의존하거나 힘을 숭배하곤 한다. 힘 있는 사람들이거나 힘 있어 보이는 사람들에게는 최대한 낮은 자세를 취하고, 자기보다 조금이라도 약해 보이는 사람들은 가차 없이 무시하고 모욕하고 이용하기를 서슴지 않는 편리한 삶의 방식인 것 같다.
안타까운 것은 이런 모습이 우리들의 지도자들도 예외가 아니라는 것이다. 문득 반면교사(反面敎師)라는 말이 생각난다.
이 말은 ‘다른 사람이나 사물의 부정적인 측면에서 가르침을 얻는다’는 것으로 그 유명한 ‘타산지석(他山之石)’과 비슷한 말이지만, 그보다 의미가 더 즉각적이고 강력한 것이다.
이 말은 1960년대 중국 문화대혁명 때, 마오쩌둥(毛澤東)이 처음 사용한 것으로 전해진다. 마오쩌둥은 부정적인 것을 보고 긍정적으로 개선할 때, 그 부정적인 것을 ‘반면교사’라고 하였다.
그러니까 이 말은 혁명에 위협은 되지만 반대로 보면 사람들에게 교훈이 되는 집단이나 개인을 일컫는 말을 지칭한 것이다. 요즘은 보통 다른 사람이나 사물이 잘못된 것을 보고 가르침을 얻는 것을 말한다.
내가 좋아하는 말로 ‘이문회우(以文會友)’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공자의 고제(高弟)인 증자(曾子)가 “군자는 글로써 벗을 사귀고, 벗과의 만남을 통해 인을 보강해 간다”라고 말한 것에서 유래한 말이다.
오늘 우리에겐 그야말로 엄청난 양의 정보가 홍수처럼 엄습한다. 그럼에도 ‘풍요 속의 빈곤’이랄까. 이러한 지식정보의 대량생산물 속에서 정작 인간의 삶과 가치에 대한 깊은 사색과 통찰을 느끼게 하는 것은 드문 것만 같다.
첨단기술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고전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도대체 왜 우리는 옛것들에 관심을 가져야만 하는 걸까?
그 이유는 현대정신문명사의 근원을 찾아보고 이를 통해 오늘의 물질문명과 정신문명의 정체와 문제점을 파악하고 이에 대한 대안을 모색해 보려는 것이다.
특히 우리는 물질 추구와 효율성의 논리가 세계를 지배하게 되면서 인생의 의미를 상실하게 되었다.
‘궁극적 의미’가 사라지고, 오직 도구적 합리성만 판치는 이 세상에서 ‘의미’를 찾아 헤매기 시작하였다. 목적이 결여되고, 의미가 사라진 삶이란 불행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고전은 우리에게 참된 삶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것 같다. 고전을 읽으면서 그 깊은 삶의 지혜를 되새기다 보니 고전처럼 사람됨도, 사람 사귐도 오랫동안 우려낸 진국처럼 이러해야 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보았다.
오늘 책장에서 잊고 있던 고전을 꺼내 펼쳐보면서 삶의 깊이를 되새겨 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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