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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올로기 마지막 증인인셈 자전적인 소설로 증언할터"
아직도 철없이 까불고 연애하고 싶은 나이 필화사건으로 옥고치르며 문학과 단절 다짐...행시 준비도 생계땜에 교직 못접은게 평생 한...문학은 사회갈등 치유제
익산신문 기자 / ikpress@naver.com 입력 : 2009년 08월 24일(월)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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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고 싶었습니다 - 傘壽맞은 홍석영 원광대 명예교수
'제자복이 많다'는 홍석영 원광대 명예교수(80). 그가 지난 17일로 산수(傘壽)를 맞았다. 이를 기념해 소설가 윤흥길?박범신?양귀자?안도현씨를 비롯 제자들이 산수잔치를 열어 제자복을 실감케 했다. 이 자리에는 제자들과 가족이외도 이동희 전북문협 회장은 물론 김남곤 시인(전북일보 사장), 아동문학가 서재균씨, 문학평론가 오하근?전정구 교수, 시인 소재호?호병탁씨, 시조시인 양점숙씨 등 내로라하는 작가들이 참여해 축하했다. 지난 19일 한국근대사의 산증인인 선생을 만나 문학과 인생에 대해 들어봤다. /편집자주
-감회가 새로울 것 같은데요.
"물론이요. 4살 때 24살 나이로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8살 때 29살로 부친이 요절했어요. 서른 땐 아버지보다 1년 더 살았다고 안도했고, 매년 부모님 나이와 비교하며 나이셈을 하곤 했지. 이젠 어머니보다 3배 이상을 더 산 셈이니 원 없어요. 그런데도 아직 철없이 까불고 연애라도 하고 싶은데 벌써 팔십이라니 기가 차올라. 게다가 이를 또 공식화했으니…. 안됐다 싶어요(웃음)."
-정말 고생 많으셨겠습니다.
"어려서부터 참 외로웠어요. 그나마 선친이 5형제중 막내라 조모와 백부 사랑으로 버텼지요. 외양으론 별탈없이 자랐어도 마음 한 구석은 늘 비어있었어…. 그래 초등학교때 유일한 소망이 사범 나와 초등학교 선생하는 거였소. 선생이라도 하면 자식놈이 '저 선생이 우리 아버지'라고 자랑할 것 아니요."
-그렇게 해서 전주사범을 가신거군요.
"혼자다 보니 공부안하면 장래가 형편없었어요. 열심히 공부하지 않을 수 없었지. 1944년 전주사범 진학했는데 종전 무렵이어서 무척 어려웠어. 전교 1~2등 다투던 사람들이 모인데다 15대 1로 경쟁률이 높았음에도 용케 들어갔지."
-전주사범 시절 필화사건에 휘말리셨지요.
"맞아요. 그게 그러니까 1948년 6월이었어. 전주사범 5학년이었는데 동아일보 부국장을 지낸 정구하 선생·장윤철 등과 함께 등사판에 찍어 '횃불' 동인지를 만들었지. 미군정하 포고령에 위반했대서 전북경찰서 유치장에서 10일, 전주교도소 감방에서 20일 보냈어. 용수 쓰고 굴비 엮듯 끌려가서. 18살 나이라 놓여나기는 했지만…."
-충격이 대단하셨겠습니다.
"그렇지. 이후 문학을 다시는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어. 초등선생으로 간 뒤 권력있는 사람이 돼야겠다 싶어 행시를 준비했어요. 이 무렵 몽테스키외의 '3권 분립론' 등도 읽었지. 선생하면서도 방과 후면 열심히 공부했어."
-이후 어찌 되셨는지.
"시절이 혼란스럽다보니 잘 안됐어. 이제 대학을 가야겠는데 정작 말을 못꺼내겠더라고. 그 무렵 여선생 한 분이 8만원을 대줬어요. 단국대만 남아있어 정치과에 입학했으나 6.25로 정국이 불안정해지면서 결국 원광대 국문과를 나오게 돼요."
-광복도 그렇고 6.25 등 혼란기를 겪은 탓에 소설가가 되지 않으셨는지.
"그렇다고 볼 수도 있을 거요. 아마도 동서냉전 등 이데올로기의 마지막 증인일 거야. 6.25때도 생사 넘나드는 고비를 많이 넘겼어. 천장 속에 숨기도 하고, 창고에 갇혀있기도 했고, 총살당할 뻔한 위기도 있었소. 살아 있는 것이 기적이었지. 어쩔 수 없이 문학으로 되돌아왔고, 여태 문학을 하게 됐지."
-구체적인 동기가 있을 법 한데요.
"일제 강점기 초등 3~4년으로 기억해. 일본 시게노 선생이 그림 있는 시집 두 권을 선물해줬어요. 전통시인 이사의 '하이꾸'였어. 야윈 개구리와 뚱뚱한 개구리가 싸우는데 이를 8살짜리 아이가 지켜보며 야윈 개구리야 짖지 말라고 부탁하는데 영락없는 나 같았지. 모르는 새 문학에 빠지게 됐고…. 아니 6.25만 겪지 않았다면 행시에 되갖고 다른 삶을 살았겠지. 6.25땜에 문학과 인연이 되갖고 오날날이 됐습니다(웃음)."
-소설가가 된 걸 후회하시는지.
"아니 전혀. 되레 생활고 때문에 교직을 떠나지 못함은 늘 한이 됐지. 소설 쪽에서 성공뫀 못했어도 작가 욕심은 컸어. 사회의 어지러움과 생활의 갈등을 해소하는 길은 문학 밖에 없어.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를 탐구하는 것이니 모든 사람들의 삶이 문학에서 벗어날 수 없어요."
-그럼에도 종종 문학의 위기를 얘기하곤 하는데요.
"문학위기 이전에 우리 문제는 인문학 위기지. 아시다시피 우리나라는 1970년대 산업입국입네 공업입국입네 하면서 산업적인 발전에만 온 힘을 쏟았어. 그러다보니 상대적으로 관심이 적은 인문학은 쇠퇴할 수밖에. 문학은 인문학의 중요한 핵심이고…. 실제로 문학활동 50년이상을 했으나 문인대우가 형편없어요. 원고료도 별반 오른 게 없고. 작가나 시인할라치면 굶어죽기 알맞지. 자존심을 갖고 사는 것에 불과해."
-문화 콘텐츠가 대세인 세상이지요.
"맞아요. 요즘 스토리텔링 얘길 종종 하는데 이제야 문학의 역할이 제몫을 찾는 게지. 그럼에도 아직 문화국가가 되지 않아서 지자체장의 의식구조가 낮아. 여전히 공장 유치해 세금 많이 걷는 걸 더 좋아하지. 이런 환경에서는 문학발전이 이뤄지지 못해요. 관심이 아예 없으니 나아질 기미도 없고. 지역언론의 책임도 있어. 어느 면에서 미디어법은 잘한 것이요. 장차 그리해야 방송도 살고 신문도 살지. 아 일본 요미우리를 봐. 신문이 방송까지 갖고 있잖아. 우리도 그렇게 돼야 해."
-앞으로 계획은요.
"10여권의 장?단편집을 냈는데 앞서 말했듯 이데올로기의 마지막 증인이 될지도 몰라. 인생에서 가장 왕성하게 활동할 20대때 6.25를 겪었고. 지금 세대는 이데올로기 갈등을 모르지. 헌데 사실은 한국문학 화두가 바로 이데올로기 갈등이야. 이를 겪은 당사자로서 자전적인 장편소설을 쓰려 해요."
-64주년 광복절을 맞으신 소회가 남다르실 것 같습니다.
"전주사범 2학년때 해방을 맞았는데, 희망도 많았지. 하지만 혼돈시대다보니 어려움을 더 겪었어요. 그로부터 64년이 지났는데 그런 비극 속에서도 살아남은 것을 생각하면 참으로 다행이지. 민족의 저력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골육상쟁을 겪으면서도 살아남았고, 남한이 고도의 성장과 더불어 세계 10위권 내 대국으로 발전한 것도 기적이요."
-혹 좋아하는 작가가 있으신지.
"현대문학에 진입하려면 러시아의 도스토예프스키를 거쳐야 해. 김동리 소설이나 이효석, 이태준도 필수고. 개인적으로 김남천이나 황설야도 습작기에 많이 읽었어요. 젊어서 탐독해야 문학의 힘이 생기는 법이거든."
-가장 애정이 가는 작품은요.
"단편 문학선집에 자주 소개된 작품인데 '눈썹'이 늘 가슴 복판에 남아요. 고향에 나환자촌이 있었는데 우연히 '강모'라는 지성인을 만나면서 그의 숙명에 깊이 동경하게 됐어. 호기심을 갖다보니 소설까지 구상하게 됐고."
-마지막으로 한마디.
"운이 좋은 편 같애. 평생 취직운동 한번 안하고 살았으니. 중학교 갈 때도 고등학교 교사시절도 그렇고 전부 자연스럽게 초빙됐어요. 필요하면 늘 불러줬으니 집요하게 성취욕을 갖고 하려했던 것은 없어. 그런데 나이 먹으니 고루해지고 완고해지고 욕심이 많아지더라고. 꼴통골수에 가깝게 의식이 굳어지는 것을 느끼곤 해. 모쪼록 싸우지 않는 조용한 세상이 됐으면…. 문학도 자식도 주변에 부담을 많이 줘 미안하고 쓸쓸해요."
<취재를 마치며>
왕궁면에서 태어나 공부와 취직 때문에 몇 년 타향살이 한 것 빼곤 평생을 익산에서 살았던 선생. 그 만큼 온 열정을 익산에 쏟아 부었던 사람은 별로 보지 못했다. 말하자면 그는 익산의 산증인인 셈이다.
가장 큰 그림자가 문학의 공적. 스스로 활동도 모자라 원광대 국문과 교수로 있으면서 윤흥길 박범신 양귀자 등 기라성 같은 작가들을 길러냈다. 한국소설문학의 큰 산맥을 이룬 것이다.
그 뿐인가. 인품으로도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 그의 그늘에서 익산지역 뿐 아니라 많은 문인들이 성장했고, 동지가 됐다. 산수잔치는 그래서 성대했다. 내로라하는 작가들이 열일 마다하고 참여한 것이다.
이날 원광문학회 회장인 박범신씨는 "불모 같았던 익산에 큰 그늘이 되셨던 분"이라고 소개하면서 "젊은 오빠처럼 건강하시길 소원한다"고 기원하기도 했다.
애시당초 작가에게 예약된 행복이란 없다고 주장하는 선생. 1960년 '자유문학'지에 소설가로 등단한 이래 창작집 '이적의 밤' '피서지' '우리들의 대부님' '바람과 사슬' 등을 내놓으며 묵묵히 필생의 고업을 달성중이다.
/김영애 기자 yo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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