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 김삼식 (자)이리청과회사 공동대표 | | ⓒ 익산신문 |
음악용어로 기저에 저음으로 반복 지속된다는 뜻의 ‘Basso Ostinato’라는 말이 있다.
마치 기차의 ‘칙칙푹푹’ 또는 파도의 ‘철썩’ 소리처럼 말이다.
우리 지역사회도 그와 같은 반복되어 바닥에 깔려 있는 몇 가지 기저 저음이 있다.
다만 이것이 양날의 검처럼 사회안정과 반대로 불안을 초래할 위험인자로 돌변하는 모순된 양면성도 있다는 전제로 이야기를 시작하고 싶다.
먼저, 고난의식이다. 6.25전쟁 이래로 작금의 70여 년은 역사상 전례 없는 ‘전쟁 없는 평화시대’라 할 수 있다. 과거 조선시대 임진·정유왜란부터 1671년 경술대기근까지의 민족에게 가장 잔인했던 70여년의 고난의 시기와 견주어 보면 극단적 차이가 있음에도 그 때 외적과 기아와 싸우던 인내와 극복력이 이 평화시대에도 피해의식과 열등의식으로 둔갑하여 사납게 살아나 적대하듯 서로를 대하고 자기를 비하하면서 정치적으로 각박하고 불신하며 목전은 다툼이 일상화되는 지경이다.
특히 과거 피로 얼룩진 사화 같은 당쟁적 소모전을 방불케 하는 정치적 치킨게임이 가관이지 않은가! 고난의 그 70년의 단초가 되었던 분열상이 지금처럼 반복된다면 또 다른 불행한 70년을 초래할 만한 개연성이 있음을 반성하자는 것이다.
다음은 평등의식인데 공자 말씀인 불환빈 환불균(不患貧 患不均)로, “가난은 참을 수 있으나 불평등한 것은 견딜 수 없다”라는 의미로 균등히 백성을 대하라는 통치권력에 대한 조언으로 회자되며 가난해도 인내하여 전통사회 안정을 지향하는 공공개념의 한 축으로 활용될 만큼 우리에겐 긍정적으로 친숙한 의식이다.
그러나 이 또한, 모두가 다 같이 가난에 대한 숙명주의나 패배주의, 배타주의로 급선회할 위험인자이다.
가난은 참아도 남이 잘사는 것은 못 참는 시기 질투로 문해적 오독도 가능하고 과거 우리의 고질적 병폐인 엽전의식, 자기비하를 넘어 남을 그만큼 폄하하는 우를 범할 소지가 있다는 것이다.
현대 중국은 분명 사회주의 국가이나 극히 자본주의적이다. 반면 우리나라는 거기에 비하면 사회주의적 자본주의 국가처럼 그들에겐 보일 것이다. 성장과 안정 생산과 분배 자유와 평등의 조화가 중용의 정신으로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는 뜻이다.
마지막은 유교의식이다. 법치시대인 지금도 우린 경찰단속에 처하면 도리와 예의에 호소하며 항변하는 모습처럼, 시대상엔 불합치한 일면들을 흔히 목격하곤 한다.
조선 건국이념인 성리학에 기초한 우리의 전통사상인 덕치와 예치가 아직도 우리의 뇌리에 작동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또한, 기독교인, 불교인이 각각 압도적이라 하여도 서로 종교 분쟁이 없고 가정적 갈등은 고사하고 사회적 갈등 요인이 되지 않는 것도 유교적 기본 틀 우리의 친족관계에 기반한 인간 관계우선주의와 체면, 도덕 지향주의가 몸에 배어 있고 약자 배려와 동정, 어른, 선배, 학벌 존중사고가 그러한 유학적 토양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법의 비인간적인 면을 순화하고 휴머니즘을 실현하는데 적절한 사회적 보충제로 작동돼야 할 이유는 충분하지만. 근대화 과정에서 구습적 병폐로 규정되고 배타주의나 독선주의로 회귀함을 경계하였듯이 자칫 법치주의의 근간을 폄훼할 위험인자가 될 수 있음을 경계해야 한다.
우리는 주변 4대 강국 중 2번째로, 최강국가 미국 다음으로 개인 소득이 높은 나라이며 유일하게 남을 침탈하지 않는 10대 강국이다. 이런 우리가 아직도 불안과 초조함으로 서로 불신하는 풍조는 후진적 현상일 뿐이다.
상기한 탁월함(Arete)과 악덕(kakia)의 양면 그리고 겸허(humilitas)와 오만(hybris)사이에서 현실 변용의 슬기와 다양함(Multiplicity)을 포용하는 관대한 대륙 정신 즉 강국의 면모를 우리도 창출해야 할 때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