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 김도영 원광대 한중관계연구원 연구교수 | | ⓒ 익산신문 |
난 익산인이다. 우리의 영혼을 울린 ‘아침이슬’의 김민기를 모르는 한국 사람은 간첩이다.
그런데 그가 떠난 후에야 그가 익산인임을 알았다. 정확히는 익산 함열인이다.
그의 이름은 수없이 들었지만 그의 얼굴은 최근 처음 보았다.
난 김민기란 사람은 예민하고 날카로운 시대의식을 지닌 줄 알았다. 그런데 그를 처음 본 순간 충격 그 자체였다.
“저 사람이 그 김민기라고…” 정말이지 믿기지 않았다. 바보처럼 웃는 어린아이의 순박한 얼굴. 그 물들지 아니한 늙은 소년의 웃음은 단박에 나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난 이렇게 선생님에 대한 연민과 나에 대한 자괴감에 펜을 든다.
우리 고향의 엄청난 자랑임을 이제야 알다니…. 왜 우리 고향사람들은 아무도 김민기를 말하지 않았는가? 나만 무식해서 몰랐던 것인가? 내 고향 익산, 그 어느 곳에서도 김민기를 기리는 그 아무 것도 본 적이 없다.
그가 태어난 곳, 1978년 낙향하여 농사를 지었던 곳, 1980년 김제로 옮긴 곳 그 어디서도….
그가 떠난 최근에야 6년전 인터뷰에서 극단 ‘학전’ 대표임도 알았다. 영상에서 전해지는 그의 언어와 몸짓을 통해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었다.
‘지하철1호선’이 4천회를 넘으면서 대학로의 상징이 되어갈 무렵, 돈벌이도 안 되는 어린이극에 남은 정열을 쏟은 것은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려준다.
“아이들이 이상적 판타지 동화만을 읽는데, 아이들의 삶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작품은 매우 적다.” 이렇게 그는 이제 더 이상 ‘아침이슬’만의 대명사가 아니었다.
세월호 관련 작곡제의를 거절했다한다. 이유는 자신은 지금까지 어떠한 의도로 작사하고 연출한 적 없다. 백지상태가 그리기 쉽다.
‘아침이슬’도 저항가요로 짓지 않았다. 이사 간 집이 수유리 묘지 근처였고, 나만의 지하작업실에서 그 풍경을 보고 지은 것이다.
그런데 그 ‘태양은 묘지’라는 단어 때문에 ‘금지곡’이 되었다. 백지상태에서 그 모습을 글로 옮긴 것뿐인데, 그 노래가 내손을 떠나더니 민중가요가 되어있었다. “난 그냥 내 마음을 표현한 건데, 다른 사람들도 나와 같은 마음이었구나.”
연극배우 선발의 가장 기본조건 역시 백지상태다. 어느 한 캐릭터로 고정되면 다른 역할을 할 수 없기 때문에 無상태의 배우를 뽑았다.
無에서 有를 이루고도 항상 뒤안길에서 미소 짓고, 배움 밭에 소중한 씨앗을 뿌린 옆집 농부아저씨….
나와 함께 호흡한 동시대인이며, 나의 가장 가까운 고향사람임에도 알지도, 한 번도 만나지 못함이 나의 박복함인가? 생전에 선생님을 만났던 사람들은 얼마나 복이 많은 사람들인가?
선생님이 생전에 내 고향사람임을 알았더라면, 당신을 찾아가 나의 슬픔과 서러움을 하소연하였을 것을.
그랬더라면 선생님은 늙은 군인의 넋두리를 듣고 노래를 만든 것처럼 소외된 자에 항상 따듯한 시선을 보낸 것처럼 틀림없이 나의 넋두리에 깊이 공감하고 노래를 지어주셨을 것을….
아…. 박복한 나일지다. 이제라도 선생님이 남기신 無言의 정신을 마음속 깊이 기리며 추모하리라.
선생님의 영혼이 나의 이 마음을 알아주시고 한 번도 뵙지 못한 나를 위로하리라.
이렇게 그가 떠난 후에야 알다니 익산인으로서 차마 고개를 들 수가 없다.
그가 태어난 곳은 익산 함열 어디, 낙향하여 농사지은 곳은 익산 어디인지 알아 볼 꺼다.
익산 함열인. 작은 거목 김민기. 그는 차지하지 아니하고 더 큰 자리를 차지했고, 작게 말했는데, 더 크게 울렸으며 그 작은 물줄기가 흐르는 강물처럼 흘러 大海를 이루었음을 당신이 떠나간 후에야 비로소 알게 되었음을 더욱 슬퍼하노라.
그리고 당신을 낳게 해준 내 고향의 흙과 하늘을 더욱 자랑스러워한다. “내 고향 가는 길 뜨거운 남도길”(1973)은 바로 ‘익산으로 가는 길’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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