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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훈부는 11월의 독립운동가에 학생비밀결사를 결성하여 항일투쟁을 한 서상교·최낙철·신기철 선생을 선정했다.
서상교 선생은 대구상업학교에 재학 중이던 1942년 5월, 김상길·이상호와 함께 항일비밀결사인 ‘태극단’을 조직하여 민족의식 고취와 체력 향상 활동에 힘쓰는 한편, 군사학과 폭발물 제조에 관해서도 연구했다.
1943년 5월, 밀고로 단장 이상호가 대구경찰서 고등계 형사에게 체포되었으며, 그의 집에서 태극단 관련 문서가 발견되어 26명의 단원 모두가 체포되면서 태극단은 와해되었고, 1944년 대구지방법원 판사는 선생에게 “일본제국의 국시를 반역한 국적”이라며 당초 검사가 구형한 형기보다 높은 ‘단기 5년 이상 장기 7년’의 실형을 선고했다. 선생은 인천소년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광복을 맞아 출옥했다.
최낙철 선생은 대구사범학교 5학년에 재학 중이던 1941년 1월, 임병찬 등과 함께 독립에 대비한 학문 연구와 민족의식 고취, 졸업 후 교사로 부임하면서 조선 학생을 민족의 지도자로 양성하기 위한 항일비밀결사 ‘연구회’를 조직했다.
연구회 회원 모두 졸업을 앞둔 5학년인 관계로 활동에 어려움이 있어 대구사범학교 비밀결사인 문예부와 통합하여 ‘다혁당’을 조직했다.
이를 통해 조선 역사 서적 등 윤독과 문맹 퇴치와 민족의식 고취를 위한 야학 개설, 그리고 독립전쟁에 대비한 군사 훈련을 실시했다.
하지만 이후 최낙철 선생은 대구사범학교의 학생비밀결사가 적발되면서 체포되었고, 대전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5년의 실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광복을 맞아 출옥했다.
신기철 선생은 춘천고등보통학교에 재학 중이던 1938년 2월, 조선의 독립을 준비할 목적으로 결성된 항일비밀결사인 ‘상록회’에 가입했다.
상록회는 ‘조선 민족의 해방과 참된 조선인의 양성, 회원의 단결심의 양성 훈련’을 위해 별도의 독서회를 조직, 농촌계몽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선생은 1938년 10월, 상록회 회장 겸 서적계 책임을 맡게 되었으며, 기독교 예배당에 모여 학교에서의 일본인과 조선인 차별대우를 비롯해 농촌 문제와 관련한 일본 당국의 시정 요구를 위한 회의를 주도했다.
그러던 중 1938년 가을, 상록회가 경찰에 적발되면서 졸업생을 포함 137명이 체포되고 36명이 검찰에 송치되었으며, 신기철 선생 등 12명은 1939년 12월 2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 6월의 실형을 선고받아 복역했다.
정부는 자신을 희생하여 독립운동에 헌신해 독립운동의 숭고한 정신과 역사를 계승시킨 선생들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서상교·최낙철 선생에게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신기철 선생에게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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