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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미술협회 박미서 지부장-'예술작품 언어행위로 삶과 문화 연결'
부모반대 불구 전공바꿔 미술 꿈 평쳐
10번째 개인전 열어 작품 활동등 활발
마스터 기자 / ikpress@naver.com 입력 : 2009년 04월 27일(월)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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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로다. 산천에 색들이 제 옷을 입고 살찌고 있는 시절이다. 어딜 보아도 한 폭의 그림 같은 풍경을 담아 두지 못하는 것이 한탄스러울 때가 있지 않은가. 겨울은 겨울대로 여름은 여름대로 붓을 타일러 사람의 마음을 빼앗아가는 예술인. 누군가 사람은 밥만 먹고 살 수 없다고 말했다. 사람이라면 문화생활을 즐기라지만 당장 먹고 살기 힘든데 배부른 소리 한다고 할지 모른다. 요즘세상은 문화를 누리기 좋은 세상임은 분명한 것 같다. 밥만 먹고 산다면 너무 불행할 것 같다.
여유로운 하루하루를 보내다 보면 단순하게 시간을 보내는 것에 익숙해지기 마련. 문득 단순한 하루가 지루할 때 무언가를 갈망한다.
누구나 집안에 그림 몇 점은 있으리라 나의 집에도 중앙에 차지한 양귀비꽃이 필 듯 말 듯 나비와 놀고 있다. 그림을 보노라면 작가의 수고가 얼마나 많으면 저리도 잘 표현할까 돼 묻는다.
사람들은 무엇인가를 이용해서 자신을 표현한다. 그런 의미에서 예술이란 일종의 언어이고 행위다. 묵묵히 참선하는 심정으로 지내온 화가들은 자신의 작품세계를 통해 삶과 문화를 연결시킨다. 그러한 일이 예술인들의 업이 아닐까 생각한다. 익산 화단의 길라잡이 박미서(58) 지부장을 만났다.
부모님 그림전공 적극 반대
박미서는 전주에서 박선우,이정례씨의 4녀 1남중에 장녀로 태어났다. 교사였던 아버지 (박선우)는 영문학을 전공했고 문학도로서 글도 제법 잘 쓰셨던 분이었다. 아버지의 철학은 진보적이며 낭만적이었다. 여자들도 자신의 할 수 있는 일은 해야 하고 사회 활동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공부하라는 소리 한번 안 할 정도로 자율을 강조하신 부모님 안에서 성장했다는 것이 고마울 따름이었다.
초등학교 3학년 시절, 부모님이 친척에게 서준 보증이 잘못되어 가세가 기우는 바람에 전주에서 익산으로 이사 왔다. 모진 환경에 적응하느라 맘속에 자신의 예술적인 끼를 이끌어낼 기회가 없었다.
여고 시절 막연히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생각이 몸 밖으로 분출되기 시작했다. 이미 서예를 시작했지만 그림을 전공하겠다는 딸의 진로에는 자율적이던 아버지도 극구 반대를 하셨다.
인문학을 공부하신 아버지는 특히 그림을 그린다는 것이 배고픈 직업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란다. 또한 의대 간호대등을 진학한 동생들과 비교해도 맘이 놓이질 않았던 모양이다.
가난하게 산다며 반대하시는 아버지를 넘을 수 없어 전북대학교 섬유공학과를 지원했다. 그 후 홍익대학교 대학원 산업미술 직물디자인학과를 진학을 했지만 2학기를 마치고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됐다.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은 순수미술이었기 때문이다. 응용미술인 섬유디자인은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수요자가 없으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순수미술은 자신의 작품을 보고 한사람이라도 좋아하고 감동을 한다면 작가로써 만족할 수 있다는 생각이 깊게 자리하고 있었다.
강암선생 만나 예술세계 입문
대학에 진학하기 전 전주에 유명한 서예선생님이라는 剛菴 송성용 선생을 친구의 소개로 만나면서 예술의 세계에 입문 했다.
"그때가 선생님55세쯤 되었을 때입니다. 선생님은 아이스크림을 좋아하셨어요. 한문의 '한일'자를 시작으로 기초부터 가르치신 제자는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말씀도 없으시고 ‘쭉쭉 써’ 라는 말만 하시는데 웬만해서는 글 잘 쓴다고 칭찬하시는 분이 아니었지요"
박 지부장은 대학교 3학년 때 강암 선생의 아들 友山 송하경 교수와 만나게 됐다. 대학 서클 지도교수로 와 가르침을 받게 됐다. 또한 박지부장은 우연히 강암 선생의 딸 이당 송현숙을 만나게 됐다. 강암 선생에게 서예를 배울 때 알고 지냈던 터라 같이 서예 연습을 하자고 해 그의 집 연습실에서 서예를 했으니 강암 선생의 가족과 함께 하는 특별한 인연이 됐다.
미술에 매료돼 전공 바꿔
미술에 대한 강한 의지로 진로에 회의를 느껴 전공을 바꾸게 됐지만 늦은 미술공부로 과연 제대로 할 수 있을지 염려가 됐다.
때문에 독하게 맘먹고 미술을 시작 했다.
예술이란 처음에 스승을 잘 만나야 한다는 생각한 박 지부장은 우여곡절 끝에 목정 방의걸 선생을 만나게 되지만 방의걸 선생은 일언지하 제자를 받지 않는다고 거절 했다. 특히 여자 제자는 키우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2년여 동안을 선생의 제자가 되기 위해 노력했다.
박 지부장은 “저는 그림으로 밥을 먹고 살아야할 만큼 업으로 생각하니 그렇게 가르쳐 달라고…” 목표를 명확하게 세워 간곡히 말했다.
목정 선생은 박 지부장에게 멍청하다는 말을 자주했다. “아마 선생님이 생각하시기 에는 제가 많이 부족한 모양이에요. 그럴수록 오기가 발동해 부족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을 더 노력했어요. 아마 그런 소리를 서운하고 기분 나쁘게 생각했다면 제가 이 자리에 있을 수 없었을 것이라 생각해요”
목정 선생이 타 지역으로 전근을 하게 돼 아쉬움을 달래며 목원 임겁수 선생의 제자로 입문을 했다. “임 선생님이 안 받아 줄까봐 내가 화실 임대료 절반을 부담 했어요" 라고 말하듯 박지부장은 모든 것을 감수하면서 그림을 그릴 궁리만 했다. 예술은 스승과 연습한 시간의 몇 배를 닦아야만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에세이 문학 추천 등단
박 지부장은 “아버지는 글을 잘 쓰셨어요. 아마 제가 예술적인 면을 잘이어 받았던 것 같아요. 문학적인 것도 말입니다” 박 지부장이 남성여중 다닐 시절 대단한 분들이 많았다. 시에 이기반 선생, 수필에는 송광섭 선생, 소설가등이 있었다. 그들은 박 지부장에게 글을 써보라고 권했다. 하지만 박 지부장은 글을 쓰지 않았다. 글은 쓴다는 것은 집에서도 자신도 내키지 않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도중 문예반 편집위원이었던 박연구의 권유로 수필을 써 그중 3편이 1999년 ‘에세이 문학’에 완료추천으로 등단을 하게 됐다.
그러면서 ‘문예가족’이라는 동인지의 표지를 그려주다가 가입을 권유받아 ‘전북 문인협회’에서도 활동을 하게 됐다.
“지금도 여러 문학단체에서 가입해줄 것을 요청 하지만 일정이 바빠 가입을 미루고 있는 실정 이지요"
2009년에 봄에는 그림에세이 '사람이 살아가는 길옆에'라는 그림에세이를 발표했다.
영감찾아 그림 그려야
사람은 누구나 자아를 찾고 싶어 하듯이 박 지부장은 자신만의 것을 만들고 싶어 했다. “그림이 나의 전부가 됐습니다. 애당초 제가 그림을 접했을 때 마음가짐도 그랬지만 이만큼이라도 이루어 낼 수 있다는 것에 고마움을 느끼고 살아가는 모습을 세상에 알릴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에 감사 합니다”라며 명예가 없고 가난해도 하고자 하는 일을 한다는 것에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박 지부장은 부지런하고 정열을 쏟아 부을 정도의 마음가짐이 있어야만 좋은 작품이 나온다고 했다. 최선을 다하지도 않으면서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보면 안타깝다고 했다.
박 지부장은 “예술은 그렇습니다. 어떻게 할 줄 아는 것이 중요 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고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학습하고 연습하는 길 만이 자신의 것이 나온 다고 보면 됩니다. 이럴까 저럴까 궁리만하지 말고 영감을 찾아내어 그려야지 처음부터 요령을 피우면 안 됩니다”라며 항상 제자들에게 ‘머리로 궁리하지 말고 손으로 궁리를 하라’고 말한다.
작가는 작품으로 말해
1992년 화가로써 독립하여 익산에 작업실을 두고 자신만의 그림을 만들기 위해 홍익대학교 대학원을 수료 후 전북대학교 대학원 동양미술교육과로 입학했다. 실기도 중요하지만 이론을 무장해야겠다는 생각에서다.
1989년 풋내기(?)로 개인전을 열었는데 당시는 방의걸 선생의 지도를 받을 때였다. 이어 1997년에 두 번째 개인전을 열고 보니 조금은 자신감이 생겼다. 비로소 그림 좀 그린다는 소릴 들었다. 혼자 할 수 있는 자신감을 얻은 그는 2003년 3번째 개인전에서야 비로소 자신만의 색깔이 나오게 됐다.
“그때서야 스승이시던 방의걸 선생이 제 그림을 보고 좋다고 처음으로 칭찬해 주시더라고요. 이제야 어디 가서 그림 그린다고 할 수 있겠구나 생각했지요”
“작가는 작품으로 말해야 한다는 것에 공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어떤 사심에 억매여서는 온전한 예술인으로 거듭나기가 쉽지 않지요. 일단 작품에 몰입하다 보면 그에 따르는 사회적 영향을 가질 수 있는 것이지요”
박 지부장은 벌써 10번째 작품전을 열고 있다. 많은 개인전을 연 것 아니냐는 말에 그는 작가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말한다.
이번 작품에 대해 “그림을 그릴 때는 무엇보다 몰입도가 중요합니다. 지난번 작품까지는 자신을 벗어 던지고 정말로 나를 잊고 그린 것이었는데 이번 작품은 신나게 놀이를 하듯이 그렸어요. 행복한 마음으로 작품을 만들었지요”라며 “작품을 보는 사람에게 위안을 주고 가난한 사람에 감동을 줄 수 있는 것은 예술인들이 해야 할 업이라고 생각합니다. 가능한 많은 사람에게 위로가 됐으면 좋겠습니다”라고 작품 활동을 더욱 활발히 할 것을 다짐했다.
그러면서 시적인 서정을 느끼는 그림을 추구하고 감동하는 한사람을 위해 언제까지나 매진할 것이라는 포부를 밝혔다.
박미서 약력
남성여중고와 전북대섬유공학과를 졸업하고, 홍익대학원 산업미술을 2년 수료한 후 전북대 교육대학원 미술학과를 졸업했다. 1986년 연지회 창립 전에 작품을 출품하면서 개인 활동을 했고, 이후로 9차례 개인전을 갖고 10번째 개인전중이다. 1999년에는 수필을 등단했고 수필집 ‘사람이 살아가는 길옆에’를 출간했다.
전국 서예백일장대전 초대작가, 전국 서도협회 전북지회이사 초대작가이며 전북문인협회 회원, 문예가족의 수필가이며 익산 미술협회 지부장을 역임하고 있다. 정치인 김영배와 1남 1녀를 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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