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 한승진 황등중 교사 | | ⓒ 익산신문 |
오랜만에 뜻 깊은 영화를 보았다. 영화 제목은 <책 읽어 주는 남자>이다. 역사적 아픔을 다룬 영화로 생각해 볼 거리가 참으로 많았다.
영화 속에서 여주인공 한나는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몬 독일 나치 정권의 하수인으로 엄청난 악을 저질렀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거나 반성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자신이 한 행동에 잘못이 없다고 말한다. 그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다. 그 누구도 자신의 입장이나 위치면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자신의 행동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이 죽임을 당했음에도 그저 자신은 어쩔 수 없었다고, 그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라고,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고 많은 생각을 해 보았다.
이 영화에서 인상 깊은 장면은 그녀가 문맹자라는 것이었다. 한나는 그녀의 말대로 자신의 행동이 가져오는 결과에 대해서 깊이 성찰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녀는 문맹자였기 때문이다. 문맹자인 한나는 자신의 문맹이 밝혀지기를 꺼려해서 더 큰 처벌을 감내하기까지 한다. 문맹자인 한나의 행동……. 한나의 행동은 도덕적 성찰이 없는 행동이었다.
그런 한나가 교도소에서 글을 읽게 되고 한 권, 두 권 책을 읽어 가면서 자신의 행동에 대한 깊은 성찰을 하게 된다.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그른지 그 행동이 가지고 올 결과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시키는 자의 권위에 눌려서, 구조적 악에 휘둘려서 행동하고 그것을 당연시 여기던 자세에서 달라졌다.
행동을 왜 해야 되는지 그 행동에 가져올 결과는 무엇인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된 것이다.
생각한다는 것, 스스로 깨닫는 것 비판적 사고를 한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악을 예방하고 막아내는 인간다움의 길이다.
참으로 인간다움을 유지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는 행동의 결과는 몰랐으니까, 할 수 없었으니까라는 변명으로 용서될 수 있는 일이 일이 아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내가 속한 조직에서 관례로 흘러 왔던 잘못들에 순응하기도 한다. ‘이건 아닌데’하고 생각하지만 그것을 거부할 용기가 없거나 그것이 가져다주는 유익에 눈을 감아버린다.
필자에게도 이런 경험이 여러 번 있다. 필자는 한나처럼 문맹자는 아니다. 몰라서 그런 게 아니다.
필자는 필자의 행동에 대해 반성하곤 한다. 이런 반성은 필자가 문맹이 아니기에 그러하다. 적어도 필자는 다양한 책을 읽고 역사의식을 갖고 성찰을 거듭한다.
이 영화를 보면서 한나 아렌트가 제기했던 ‘악의 평범성’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볼 수 있었다.
또한 이것이 독일 나치 치하의 만행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있을 수 있고, 있어 왔던 일임을 생각해 보았다.
어쩜 우리 또한 제2의 한나인지 모른다. 몰랐으니까, 어쩔 수 없었으니까, 누구라도 내 입장이면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항변할지 모른다. 그렇게 변명하면서 우리가 행했던 행동을 합리화하는지 모른다.
그러나 깊이 생각해 보면 우리의 가슴 저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양심의 가책의 소리랄까, 내면의 소리는 다른 목소리를 낸다.
깊은 도덕적 성찰로 우리의 행동이 잘못된 것임을 깨달을 수 있다. 이런 자각이야말로 오늘 우리를 바르게 살게 하는 힘이요, 악에서 벗어날 수 있는 비결이다.
나 자신을 지키고 공동체를 악에서 구하기 위한 비판적 성찰은 끊임없이 우리를 알면서 구할 정신적 작용이다.
그런 점에서 오늘 내가 보는 책 한 권, 책 한 줄에서 참다운 사람됨의 길을 제공받을 수 있다. 좋은 영화 한 편이 그럴 수 있다.
흔히 가을을 독서의 계절이라고 한다. 눈이 부시게 푸르른 하늘빛을 바라보면서 지친 삶의 여유도 가져보고 책 한 권, 영화 한 편에서 도덕적 성찰의 소중한 기회를 가져보는 것도 유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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