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 정헌율 익산시장 | | ⓒ 익산신문 |
기원전 194년, 금강하구 혹은 만경강으로 이어지는 옥룡천 어디쯤에 준왕이 탄 배가 닿았다. 단군부터 내려오던 고조선의 명맥이 마한으로 이어지는 역사적인 순간이다.
<삼국유사> 「위지」에는 “위만이 조선을 치니 조선왕 준은 궁인과 좌우에서 모시는 가까운 신하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갔다. 남쪽으로 가 한(韓)의 땅에 이르러 나라를 세우고 마한이라 했다.”고 쓰여 있다.
또, <고려사>와 <동국여지승람> 등 많은 문헌 기록에는 준왕이 내린 그 마한이 바로 여기 ‘익산 금마’라고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들에 의하면, 익산 땅에 세워진 한(韓)은 고조선으로부터 유래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준왕이 익산지역에 터를 잡은 이후 미륵산 일대는 급격한 변화를 맞이했다. 부족 세력이 중앙 세력으로 발전했고, 마한은 한반도의 중심으로 떠올랐으며, 이는 훗날 백제의 바탕이 된다.
이러한 사실을 입증하듯, 익산 곳곳에는 준왕과 관련한 여러 구전들이 전해 내려온다. 삼기면에 자리한 태봉산은 고조선 준왕이 득남을 위해 기도를 하다 세 아들을 얻고, 아들들의 태(胎)를 묻은 후 산의 이름을 ‘태봉’이라 불렀다고 전해진다.
지난 6월 한국관광공사가 선정한 가볼 만한 관광지로 소개된 미륵산성은 고조선의 준왕이 내려와 세웠다고 해 ‘기준성’ 또는 ‘기준고성’이라고도 불린다. 이러한 미륵산성의 연혁은 <고려사>와 <세종실록지리지> 등 각종 문헌과 고지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또한, 준왕이 지금의 익산 일대에 남하하여 나라를 세웠다는 전승에 힘을 실어주는 고고학적 발굴 성과들도 나오고 있다.
실제로 익산에서는 다른 지역에 비해 훨씬 많은 청동 유물과 초기 철기시대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특히 기원전 190년경으로 추정되는 시기에 갑자기 세형동검 등을 비롯한 각종 청동제 유물이 발굴되는 점으로 보아 대규모 인원이 이주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임시정부 부통령을 지낸 이시영 선생이 소장하고 있던 단군영정은 전국 46개소의 단군사당 중에서도 익산에 있는 단군사당으로 왔다. 이 또한 익산이 한(韓)의 원류라는 사실을 뒷받침해주는 대목이라 생각된다.
이처럼 수많은 사료와 근거들이 ‘대한민국(大韓民國)’ 국호의 발상지가 익산임을 보여준다. 특히, 우리나라 대한민국(大韓民國)이라는 글자의 한(韓)에는 대한민국 국호의 뿌리라는 의미도 담겨있다.
조선 말기 고종 황제는 이익의 ‘성호사설’에 나오는 삼한정통론에 입각해 고조선의 정통성을 이어받은 삼한(三韓)의 한(韓)을 따 ‘대한제국(大韓帝國)’이라 했다. 이후 1919년 상해 임시정부가 이를 계승했고, 1948년 수립된 대한민국 정부도 ‘한(韓)’이라는 국호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오늘날, 로마를 비롯한 고대 유적도시들에는 수천년 시간의 마법을 품고 묵묵히 존재하고 있는 유적과 유물들을 만나보려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한민족의 뿌리이자 한류(韓流)의 원조인 고조선, 그리고 마한과 백제로 이어지는 흥미롭고 훌륭한 우리의 역사적 자산은 그 가치를 충분히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한류열풍이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역사적 과제는 더욱 막중하다. 앞으로 필자는 이 땅에서 전개된 고조선과 마한의 역사를 찾아 널리 알리고, 고도(古都) 익산의 역사적 정체성과 입지를 굳건히 해나가는 데 더욱 매진하고자 한다.
이는 시민들에게 한류(韓流)의 원조 도시, 자랑스러운 익산에 산다는 긍지와 자부심을 심어주는 계기가 될 것이며, 나아가 시민들 마음에 새겨진 역사적 자긍심은 K-푸드의 전초 기지로서 더 큰 비상을 준비하고 있는 우리 익산의 미래 발전에 강력한 동력이 되어 줄 것이라 믿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