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 전정희 전북여성교육문화센터장 | | ⓒ 익산신문 | 전대미문의 과정을 거쳐 여당의 전당대회가 끝났다.
유승민, 나경원 등의 유력한 당권주자들을 차례차례 제거하고, 안철수 후보 역시 ‘윤안연대’를 거론했다는 이유로 불경죄로 몰아 배제시켰다.
특히 안철수 후보는 지난 대선 때 후보 단일화를 이루어서 대선 승리의 공신 역할을 했고, 당선 후에는 대통령직 인수위원장을 맡아 정권 수립에 공을 세웠지만 결국 ‘국정운영의 적’으로 내몰렸다.
국가적 비전이나 정책의 승부도, 당내 리더십의 경쟁도 아닌 오로지 ‘윤심’ 획득만이 전부였던 기괴한 선거가 되어 버렸다.
전당대회는 대통령실과 친윤진영의 거칠고 무리한 개입으로 다양성이 사라지고 당내 민주주의는 실종 사태에 이르렀다.
최근 화제가 된 한 장의 사진이 그 선거의 의미를 함축한다. 대통령의 해외 순방에 배웅 나간 여당 대표가 대통령 내외에게 깍듯하게 인사하는 장면이다.
대통령과 여당 대표는 견제와 협력의 긴장관계를 유지해야 하지만 그 장면은 양자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그것은 곧 내년 총선에서의 대통령의 영향력과 정책에서의 여당의 견제 기능에 대한 예측을 가능케 한다.
김기현 후보는 연대와 포용, 탕평의 ‘연포탕’을 내세워 선거운동에 임했지만 당직이 채워진 지금 ‘연포탕’이 아니라 ‘윤포탕’이 되었다는 세간의 평가가 지배적이다. 선거과정 만큼이나 선거 후의 당내 역학도 다양성과는 거리가 멀다.
다양성이 살아 있어야 경쟁력이 생기고 외연을 확장할 수 있지만 일사불란한 줄세우기와 복종만이 남았다. 당·청 관계는 평화가 유지되겠지만 대통령실의 국정 독주를 막을 힘은 없다.
온갖 인종과 민족의 전시장인 이민자의 나라 미국은 겉보기에는 혼란스럽고 질서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러한 다양성과 포용성이야말로 미국 민주주의를 지키고 이끌어 온 힘이다. 민주당이건 공화당이건 일사불란과 같은 전근대적 가치는 존재하지 않는다.
‘당론’이라는 이름으로 특정 사안에 대해 전체 의원들의 생각과 행동의 통일을 강요하지도 않는다. 의원 개개인이 헌법기관이라는 말을 달고 사는 우리나라는 의원의 자율성과 독립성을 때에 따라 원천봉쇄하는 경우가 많다.
IT 기술의 발달은 한국 정치에서 팬덤, ‘빠’ 정치를 가속화시키면서 그나마 남아 있던 다른 목소리들을 고사시키고 있다.
극성 지지자들은 18원 후원금, 댓글을 통한 비방, 악의적 문자메시지의 대량 발송과 같은 방법들을 통해 반대나 이견을 용납하지 않는다. 계파 갈등은 깊어질 수밖에 없다. 같은 정당 내에서도 적대적 공존이 이루어진다.
선거를 앞두고 매번 정치개혁을 내걸고 위원회를 만들지만 한국의 구태적 정당 시스템은 거의 변하지 않았다. 공천 학살, 공천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인위적 교체를 이룬다 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 구조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거대한 중앙당과 ‘옥쇄 가지고 나르샤’ 사건처럼 당대표가 절대적 영향을 미치는 정당 시스템을 바꾸지 않는 한 자율성과 다양성이 살아 숨쉬는 진정한 민주화는 기대하기 어렵다.
이미 오래전, 미국의 정치학자 새뮤얼 헌팅턴은 정당의 적응성·복합성·자율성·응집성을 중심으로 정당의 제도화를 분석한 바 있다. 반대로 경직성·단순성·예속성·분열성을 나타내면 제도화의 수준이 낮아 후진성을 면치 못하는 것이다.
헌법기관인 의원들이 본연의 지위를 회복함으로써 자율성과 정치의 효율을 높여야 한다. 대의제 민주주의는 정당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 정당이 제 몫을 해내지 못하면 제대로 된 민주주의라고 하기 어렵다.
때가 되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정치개혁특별위원회가 겉에 드러난 상처에 연고를 바르는 정도가 아닌, 안에 곪아있는 근원적인 문제를 들여다보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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