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 이흥래 전 전주MBC 보도국장 | | ⓒ 익산신문 | 며칠전 TV에서 ‘어른 김장하’라는 다큐멘터리를 다시 보았다. 사실 지난 설 연휴에 그 프로그램을 유튜브로 조금 보기는 했었다. 하지만 이리저리 오가는 연휴의 산만함 때문에 제대로 볼 수 없었는데 MBC가 다시 재방송한 덕분에 차분히 볼 수 있었다.
공영방송 지역사가 제작한 다큐멘터리가 전국에 방송된 데 이어 재방송까지 되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그것은 이 다큐멘터리가 보여준 소박하면서도 진심어린 메시지가 많은 공감을 얻었기 때문이리라.
김장하 선생은 60여 년을 경남 진주와 사천 일대에서 한약방을 운영해 온 분이다. 키도 크지 않고 목소리도 작았지만 그는 그 작은 몸으로 평생 벌어온 큰 돈을 지역사회에 아낌없이 기부해 왔다.
학비가 부족한 수많은 학생들에게 소리소문없이 학비를 내주었다. 머리는 좋았지만 가난했던 많은 학생들이 그의 도움으로 학업을 이어갈 수가 있었다.
또 번듯한 고등학교를 세운 후 학교가 제대로 돌아가자 아낌없이 나라에 헌납했다. 대학교에도 장학금을 주었고 지역주민들이 돈을 모아 세운 지역신문사나, 연극단체를 비롯한 지역의 많은 문화관련 단체들도 그의 도움으로 제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오랫동안 민중의 차별과 개혁을 지지해온 단체는 아예 대표를 맡기도 했었다. 그가 서슴없이 지원한 덕분에 많은 사회단체들도 주민과 함께 지역에서 살아올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가 지역을 위해 얼마를 기부했고 누구를 도왔는지는 가까운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알음알음 알려졌을 뿐, 그가 말을 하지 않으니 알 수가 없었다. 오히려 주변에서 누군가라도 물으려하면 그는 입을 닫아버렸다.
그는 넉넉지 못한 가세 덕분에 일찍이 한약방에 취업했고 그런 덕분에 약관의 나이로 한약사 자격증을 취득하게 된다. 새파란 젊은이가 개업한 한약방이 약값 싸고 잘 낫는다는 소문이 나면서 매일 환자들로 문전성시를 이뤘다고 한다.
그렇게 60여년을 성실하게 살면서 많은 돈을 벌었지만 그는 80이 된 지금까지 그 흔한 자가용 한번 굴려본 적이 없다. 고등학교 개교 기념식에도 그는 자전거를 타고 나타났고, 교사들에겐 푸짐한 쇠고기 갈비가 이사장의 지갑에서 자주 제공되곤 했다.
각종 단체를 지원했으면서도 그의 자리는 늘 행사장의 가장 말석이었고 그는 연설마저도 고사하곤 했다고 한다. 프로그램에는 아직까지도 터벅터벅 남강 다리를 걸어서 한약방으로 출근하는 그의 모습이 나타나곤 한다.
그렇게 지역과 사람을 사랑해온 그의 행적을 알리고 선양해야 한다는 이들이 수도 없이 많았지만 그는 단 한 번도 이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고 한다.
오죽해야 주변 사람들이 그의 생일날, 볼 만한 공연이 있다며 소극장으로 유인한 덕분에 그는 처음으로 그의 도움을 받았던 이들을 만나게 되지만 흐뭇한 웃음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지금은 높이 된 장년의 판사님이 그의 도움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렸고, 어떤 이는 잘 되지 못해 죄송하다고 눈물지었지만 그는 묵묵히 어깨만 두드려 주었다. 그렇게 살아준 게 고마울 뿐이라는 선생의 소박하면서도 진솔한 얘기는 세상 그 어떤 가르침보다도 깊은 울림과 깨우침으로 보는 이들에게 차분히 전해진다.
프로그램은 이 작은 몸뚱이의 김장하 선생이 어떻게 세상을 위해 봉사해 왔으며, 남이 알면 안 되는 진정한 봉사의 참모습을 담담한 모습으로 보여준다.
나는 익산 출신은 아니지만 오랫동안 언론인 생활을 통해 익산의 오늘을 이뤄온 많은 선각자들을 기억하곤 한다.
호남선과 전라선이 합쳐지고 전라도의 물류가 몰려 활기가 가득했던 익산, 하지만 그 풍요로웠던 과거는 빛바랜 달력처럼 날로 퇴색해져 가고 있고 이제는 인구 감소와 성장동력의 소진으로 을씨년스럽기만 하다.
그게 어디 익산뿐만이랴. 이 지역 출신기업인 쌍방울 마저도 도매금으로 매도되는 요즘 우리 익산을 과거의 풍요로 이끌어주고 가르쳐줄 김장하 선생같은 분이 더욱 많아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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