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 전 원광중 교장·시인 송태규 | | ⓒ 익산신문 | “남기지 말고 다 먹어라. 키 크려면 많이 먹어야 한다.” 어릴 적 밥상에서 밥을 남기면 어머니가 흔히 하시던 말씀이다. 그 말씀을 거스르지 못하고 마지막까지 밥을 꾸역꾸역 밀어 넣었다.
그러고 나면 과식으로 여지없이 속이 불편했다. 당시에는 밥 대신 특별히 배를 채울 음식이 귀하던 때였으니 어머니는 삐쩍 마른 아들이 밥이나마 많이 먹기를 바라셨다.
요사이 어머니를 모시고 식사할 때가 있다. 어머니 말씀이 바뀌었다. “남기지 말고 다 먹어라.” 대신 “배부르면 남겨라.”라는 말씀으로. 먹을 게 지천으로 널려 있는 세상에 과식이 결코 건강에 이롭지 않다는 것을 아시고 하시는 말씀이다.
조금 덜 먹고 부족한 듯해야 오히려 가뿐하다는 것도 먹는 걸 줄이고 있는 요즘에서야 깨달았으니, 나는 끝까지 어머니보다 한 수 아래다.
근 10여 년 동안 든든하게 내 허리에서 바지를 붙들어 주던 벨트가 제 역할을 다했다. 매끈하게 닳도록 손때가 묻어 참 편안했다. 수명을 다한 기미가 보였지만 익숙했던 것이라 차일피일 미루다가 쓰레기통에 넣었다.
장롱을 뒤져보니 언제 구했는지 기억조차 까마득한 벨트가 구석에 있었다. 고급스러운 모양에 혹해서 얼른 허리에 감았다. 하지만 내 마음과는 다르게 쉽사리 정이 붙지 않고 끝부분이 길어 거추장스러웠다. 벨트를 맬 때마다 낯선 이와 동석한 것처럼 어색했다.
조임쇠를 풀어 적당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을 잘랐다. 바지 고리에 넣고 조여 보니 끝에 간신히 걸렸다. 너무 많이 잘랐다. 다시 붙일 수도 없는 노릇이다. 멀쩡한 벨트가 순식간에 한낱 가죽끈으로 밀려났다.
조금씩 자르는 꼼꼼함을 발휘했어야 했는데 아쉬운 마음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난감했다.
내 손톱은 만날 먹고 잠만 자는 모양이다. 손톱만큼 빨리 자라는 것을 찾기도 쉽지 않다. 엊그제 다듬은 것 같은데 비 온 뒤 잡초 크듯 어느새 웃자라 거추장스럽다. 조금이라도 늦게 자라라고 바짝 깎았다.
말끔하게 잘랐다고 좋아했는데 막상 무엇을 집거나 주머니에 손을 넣을 때마다 아팠다. 이래저래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었다. 조금만 덜 잘랐다면 이런 고통을 받지 않을 텐데. 한번 잘려 나간 벨트와 손톱을 다시 붙일 재주는 없다. ‘조금 덜 자르걸’하며 후회해도 이미 시위 떠난 화살을 돌이킬 수 없다.
여행길 짐도 가득 채우지 말고 조금 덜어 비우면 내 어깨부터 가벼워질 텐데. 마찬가지로 마음의 짐도 덜어내면 기분이 상쾌해지지 않겠는가.
윤기 흐르는 삶을 살아가는 이들은 늘 주변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 있다. 내 마음을 비우고 편안한 마음으로 상대를 존중해야 기울지 않는 관계가 이어진다. 장작과 장작 사이에도 틈이 있어야 한다.
모닥불을 붙일 때 장작을 빈틈없이 너무 촘촘하게 쌓아 두면 숨 쉴 틈이 없어 불이 잘 일어나지 않는다. 서너 개를 덜어내서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 살면서 바람 한 점 통할 여유 없이 빽빽하게 나를 채우면 이미 기진맥진이다. 그런 마음으로 누군가를 만나면 오히려 상대에게 짐을 안기게 된다.
그릇은 덜어낼수록 평수가 넓어진다. 마음의 평수도 마찬가지이다. 놓아야 할 욕심은 과감하게 덜어야 한다. 비록 가진 것이 적어도 채우려고 몸부림하지 않고 더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어려운 이웃에게 늘 후하게 대하지는 못할망정 조금 덜 야박하게 군다면 얼마나 좋을까.
법정 스님은 입안에 말이 적고, 마음에 생각이 적고, 뱃속에 밥이 적어야 한다고 했다. 스님이 말한 무소유, 비움이란 아무것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다. 필요하지 않은 것을 굳이 지니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궁색한 빈털터리가 아닌 덜고 조금 덜 가지는 홀가분한 삶을 이야기한 것이다. 가득 채우려는 마음을 버리고 기꺼이 덜어서 조금 덜 가지고도 만족하는 삶은 진정 어려운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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