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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훈처는 4월의 독립운동가로 신민회의 주역으로 활동하며 계몽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한 안태국 선생을 선정하였습니다.
안태국 선생은 1907년경 안창호 선생의 권유를 받아 신민회에 창립회원으로 가입하여 평안남도 총감으로 임명되었습니다.
또한 「서우학회」, 「서북학회」등에서 토론회·강연회를 통해 애국주의·민권 사상을 가르쳤고, 「대한매일신보」 평양지사장으로서 신문 보급을 통해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일제가 1910년 11월「안명근 사건(안악사건)」을 기회로 신민회 간부들을 검거하기 시작하였고, 안태국 선생도 체포되어 1911년 7월 22일 징역 2년형을 언도받았습니다.
뒤이어 「신민회 사건(105인 사건)」의 최고형인 10년 징역의 언도를 다시 받아 모두 12년의 옥고를 치르게 되었으나 1915년 2월 13일 투옥된 지 5년만에 풀려나게 되었습니다.
안태국 선생은 1916년 북간도 혼춘(琿春)으로 이주하여 새 근거지를 마련하고 독립운동을 다시 시작하였습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고 후배 동지들과 함께 한민회(韓民會)를 창립, 그 산하에 결사대원을 모집하여 한민회 독립군을 창설하는데 노력하였습니다.
이후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몸담고 있던 안창호 선생의 초청으로, 안태국 선생은 1920년 3월 25일 임시정부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리고 북간도, 연해주 동포들을 단결시켜 독립운동의 발전에 헌신하기 위해 북간도 지역 대한민국 임시정부 특파원으로 임명, 파견이 결정되었으나, 장티푸스에 걸려 1920년 4월 11일 적십자 병원에서 순국하시게 되었습니다.
안태국 선생의 장례식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 3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되었고, 상하이 정안사로(靜安寺路) 외국인 공동묘지에 1920년 4월 14일 안장되었습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에 안태국 선생께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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