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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익산의 도심은 과거 이리(裡里)시였는데 이곳에서 한국의 근대농업은 꽃이 피었다. 내년이면 100주년을 맞이하는 이리농림과 익옥수리조합, 그리고 만경강을 따라 늘어선 대농장들은 막강한 농업생산력을 자랑했다.
맨 처음 금강 유역에 형성되었던 성당, 웅포, 함라 등의 전통적인 농업지역, 조선시대 호남의 관문이었던 여산과 금마 중심의 익산, 그리고 만경강을 배경으로 형성된 이리시가 바로 지금 익산의 도시구성이라고 할 수 있다.
금강 유역과 만경강 유역에서 각기 서로 다른 특성을 갖고 형성된 두 도시는 1995년 이리-익산이 통합되면서 하나의 도시가 되었다.
그러나 각기 유구한 역사를 지닌 두 개의 강이 하나의 물줄기가 되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이리-익산 통합이 이뤄진지 26년이 지났지만 익산의 역사성을 명확하게 정의하기란 쉽지 않다.
2019년 익산문화도시 프로젝트를 시작하면서 익산이 역사문화도시를 표방한 것은 바로 이런 문제에 대해 명확한 답을 만들어 보자는 시민들의 소리 없는 요청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 도시에 이렇게 두 개의 큰 강이 흐르는 사례는 많지 않다. 두 개의 강은 익산이 갖고 있는 다양성과 역동성을 상징한다.
익산이 갖고 있는 여행자 도시의 이미지를 굳이 부정적으로 볼 것이 아니라 늘 새로움을 추구하고 역동적인 에너지를 품고 있는 다양성의 도시로 보면 어떨까 하는 것이 바로 익산문화도시가 지난 3년 동안 시민들과 같이 고민하고 합의한 관점이다.
그리고 이 두 개의 강을 이어주는 핵심개념으로 설정한 것이 바로 ‘보석’이다. 역사적으로는 1400년전 미륵사지석탑의 사리장엄이 보여준 화려하고 아름다운 금세공의 흔적이 있고, 1980년대 익산귀금속산업단지를 통해 만들어진 ‘보석의 도시’라는 도시브랜드가 있으며, 2000년대 이후 왕궁에서 기반을 만들고 있는 보석산업클러스터의 역사가 있다.
이 보석의 역사는 이제 단지 보석을 넘어 다양한 문화예술과 만나며 시민들의 생활공예로 발전하고 있다. 더 나아가 익산의 보석은 이제 도시의 아름다움과 나의 일상을 빛내주는 시민공예로 발전하고, 꽃, 매듭, 석공예, 책방 등 ‘나만의 보석’을 다양한 일상으로 체험하고 있다.
그 속에서 젊고 유망한 신예 보석공예가들은 도시 곳곳에서 공방을 열어 미래의 스와로브스키를 꿈꾸며 혁신의 꿈을 키워가고 있다.
1970~80년대 이리귀금속보석산업에는 충청과 호남 일대의 가난한 소년들이 미래의 꿈을 안고 몰려들었다. 낮에는 보석을 깎고 밤에는 야간학교를 다니며 꿈을 키웠다. 길바닥에 굴러다니는 돌멩이 같았던 인생들이 이곳에서 그들이 갈고 닦았던 보석처럼 피어났다.
익산의 보석은 한때 이들 소년들과 함께 무려 1만여명의 익산시민들이 가난을 이긴 힘이었다. 익산과 익산사람들에게 주얼리와 보석은 사치가 아니고, 삶이었고 위로였다.
그런 점에서 익산문화도시가 설정한 ‘보석’의 개념은 하나의 물질로서 보석을 뛰어넘어 사람과 도시와 역사 전체를 보석으로 인식하자는 정신을 지향한다.
익산에 살고 있는 사람과 마을과 도시 전체를 보석처럼 소중하게 여기고 그 가치를 높이자는 의미와 목표다. 그런 점에서 보석은 포용의 정신을 상징한다. ‘사람이 보석이 되는 도시, 살고 싶은 문화도시 익산’의 슬로건은 이렇게 만들어졌다.
우리가 만들고자 하는 도시는 바로 김구 선생이 ‘나의 소원’에서 말했던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 넘치는 도시다.
이제 익산문화도시는 법정문화도시로 가는 마지막 관문을 남기고 있다. 그 관문을 넘어가는 힘은 몇몇 전문가들의 탁월한 능력이 아니라 시민들의 보석 같은 마음들이다. 익산의 광야에 지금 문화와 역사와 시민의 바람이 불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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