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 송태규 심지 창의·융합 교육원 대표. | | ⓒ 익산신문 | 한 길을 30년 이상 걸었다. 돌아보니 시작이 엊그제 같다. 삐뚤빼뚤 걸어 온 발자국을 후배들이 따라 걸을까 두렵다.
지난 8월 말, 인계인수를 마치고 교장실 커튼을 내렸다. 만나는 사람마다 내게 뭐라 인사를 건네야 할지 곤혹스러워했다.
정년까지는 3년 반을 남겨두었으니 명예로운 퇴임을 한 셈이다. 아무 재주도 없는 사람이 분에 넘치는 은혜를 입고 여기까지 왔으니 얼마나 행복하냐며 축하해달라고 말했다.
책장을 정리하면서 큰마음 먹고 오랫동안 손 가지 않았던 것을 치웠다. 어떤 것은 버리기 아까워 갈등을 하기도 했다. 미련이거나 집착이다. 스님들은 달랑 바랑 하나면 충분하다고 했는데 난 무슨 욕심이 그리 많은지.
짐을 정리하다 문득 법장 스님의 열반송이 떠올랐다. “나에게 바랑이 하나 있는데 입도 없고 밑도 없다. 담아도 담아도 넘치지 않고 주어도 주어도 비지 않는다.” 이제부터 집착을 놓아버리는 일도 숙제로 남은 셈이다.
요즘은 우리 삶을 이모작이 아닌 삼모작이라 한다. 50대까지 직장 생활을 마무리하는 일모작을 마치면 60대부터 대략 20년 가까운 이모작이 기다린다. 의학의 발달과 충분한 영양 섭취로 요즘은 100세까지 살 수 있다는 것을 무리 없이 받아들인다. 이것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나머지가 삼모작인 셈이다.
인생 일모작 농사를 잘 지었다고 해서 이모작, 삼모작을 잘 지으라는 법은 없다. 스스로 관리를 잘해야 알찬 결실을 거둘 수 있다. 나이를 먹으면서 반드시 해야 할 일 가운데 하나가 책을 가까이 하는 것이다.
책 속에는 사람과 사람, 과거와 미래를 연결해주는 끈이 담겼다. 이를 통해 보이지 않는 정보를 습득하고 생각의 폭을 키울 수 있다. 나아가 인간에 대한 이해가 깊어져 삶의 지혜를 기를 수 있다.
퇴직에 대비해 책이라도 볼 겸 시내에 사무실을 한 칸 마련했다. 몇 개월 묵혀 둔 곳이라 여기저기 손 볼 데가 많았다. 앞으로 많은 시간을 보낼 보금자리라 애착이 생겼다. 구석구석 꼼꼼하게 정리했다.
여기에서 인생 이모작의 커튼을 올려야 한다. 컴퓨터 설치 등 최소한의 도움을 빼고 직접 소매를 걷었다. 선생님들과 퇴임식을 마친 다음 날부터 평소와 다르지 않게 사무실로 출근했다.
술에 취한 김유신을 태운 말은 천관녀의 집으로 향했다지만 내 차는 다행히 학교 대신 시내 사무실로 나를 데려다 주었다.
들어서면서 창문을 열고 빗자루와 걸레부터 잡는다. 정성껏 쓸고 닦다 보면 어느새 땀방울이 뚝뚝 떨어진다. 땀을 훔치며 생각해 본다. 여태 남이 차려준 밥상 앞에만 앉았다. 청소 시간에 빗자루가 내 앞에 오면 엉덩이만 슬쩍 들어주었다.
호강에 겨운지도 모르고 살았다. 이제 부축해 줄 남의 손이 없다. 어지간한 일은 내 손으로 해결해야 한다.
잘 닦여진 포장도로만 걸었다. 이제 울퉁불퉁한 비포장 길을 달려야 한다. 급하게 굽은 길을 만나기도 할 것이다. 폭우로 끊어진 다리 앞에 서서 주춤거리는 내 모습이 보이기도 할 것이다.
세상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 이런 변화를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 거슬러 오르려 하기보다 물살에 몸을 맡기고 긍정하는 마음으로 대한다면 내가 마음먹은 대로 이루어질 터이다.
어디 비바람 몰아치는 날만 있을까. 폭풍우를 견디면 맑은 하늘이 보일 것이다. 사무실 창틈으로 들어온 가을 하늘이 온통 푸르다. 찬란한 인생 이모작을 올리기 위해 천천히 무대 커튼의 줄을 당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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