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 김철모(시인, 정읍문학회장) | | ⓒ 익산신문 |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난 지 41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그 미완의 역사는 아직도 진행형이다. 군부의 재집권 야욕에 대한 국민적 저항으로 시작된 광주민주화운동은 계엄군의 발포 등 무리한 진압이 사태를 더 키웠던 것이다.
사망자 숫자가 민간인만 166명이라고 하지만 이를 믿는 광주시민은 없는 듯하다. 1996년 국가기념일로 지정되고 2001 피해자에 대한 국가유공자 인정과 국립 5.18묘지 지정으로 그 명예가 회복되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광주민주화운동의 태동 정신은 1894년 이 땅 고부에서 봉기했던 갑오동학농민혁명 정신이 도도히 흐르며 4,19 혁명에 이어 광주민주화운동에서 꽃 피웠다고 할 수 있다.
갑오동학농민혁명이 발발한지 127년의 세월이 흘렀다. 중앙정부의 무능과 지방 관리들의 학정에 시달리던 농민들이 분연히 일어난 대 사건이었다. 당시 조선은 국력은 쇠락하고 척족의 세도정치로 왕권은 쇠잔하였다.
일본과 서방열강들의 끊임없는 침략야욕 속에 지방관리는 부패하여 백성은 맘 둘 곳이 없었다. 특히 고부군수 조병갑은 그 수탈의 방법이 악랄했다.
전봉준의 신문조서인 공초를 보면 그 원인을 알 수 있다. 첫째, 기존 있던 민보 밑에 만석보를 막고 가을에는 수세를 1,750가마나 징수하였으며, 둘째, 황무지를 개간하면 5년 동안 세금을 걷지 않겠다하고 가을에 부과하였다.
셋째, 잘 사는 농민들을 대상으로 불효와 화목 못한다, 음란한 행동을 한다는 죄목을 씌워 2만여 냥을 거둬들였다.
넷째, 태인 현감을 지낸 아비 조규순 비각을 세운다며 1천 냥의 거금을 거뒀다.
다섯째, 대동미를 정백미로 거두고 정부에는 하등미를 납부하여 그 차액을 챙겼고 여섯째, 만석보를 막으면서 산주인 허락도 없이 큰 나무를 베고, 공사에 참여한 농민들의 품삯은 주지 않았다.
더구나 군수 조병갑은 만석보로 인한 억울함을 호소하는 농민들을 매로 다스렸고 이에 고부 대뫼마을에서 전봉준을 비롯한 20인이 사발통문을 작성하였다. 그러자 조병갑을 잠시 익산군수로 발령 냈다가 다시 부임시킴으로써 농민들을 또 다시 분노케 하였다.
농민들은 예동마을에서 집결하여 말복장터에서 전열을 점검하고 1894.1.10. 고부관아로 진격하였다. 이후 무장봉기와 동학농민혁명군이 결성된 백산봉기, 황토현 대첩, 전주성 입성 등으로 이어지며 혁명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그들은 제폭구민(除暴救民), 보국안민(輔國安民), 척왜양의(斥倭洋義) 구호 아래 오직 국정을 바로 세우고 백성이 편안하게 사는 세상을 갈구하였다.
동학농민혁명의 의미는 신분과 계급의 타파,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갈구하는 반봉건, 반외세의 민족항쟁이었고, 다양한 부류가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집강소를 설치한 최초의 지방자치의 원류였다.
또한 피폐한 왕정을 바로 세우고 백성이 고루 잘사는 세상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였고, 나아가 그 주력은 후에 일제 침략에 맞서 활발한 의병활동과 김구 등 독립운동 전개 그리고 손병희 등 3.1독립만세 운동을 주도함으로써 근대민주주의 발판을 만들었다.
자유와 평등, 인권, 자주, 정의, 공정 등 그 정신은 4.19혁명, 광주민주화운동, 6.10항쟁 민주항쟁 정신으로 승화되어 한국의 민주화 정신으로 꽃 피워졌다.
예나 지금이나 위정자들의 정치력은 매우 중요하다. 중앙, 지방을 떠나서 동학농민혁명정신을 되살려 국민들이 먹고 사는데 어려움 없고 행복을 추구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대통령이나 지자체장, 의원들의 덕목이 필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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