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 정성수 시인. | | ⓒ 익산신문 | 저녁노을이 붉다. 덕진연못 벤치에 몸을 깊숙이 묻었다. 벤치는 생각하는 사람의 휴식처이자 생의 모퉁이다. 하루를 마감하는 햇살이 경이롭고 신비하다. 스스로 참담함을 위로하고 기대와 희망이 가슴으로 충성한다.
희망은 밥이 아니라 생각에 있다. 울렁증도 없이 하루를 보낸다는 것은 가혹하고 비참한 일이다. 노란국화가 꽃다발을 내민다. 잡초와 화초가 한 끗 차이다.
높이가 주는 시야의 확장이 놀랍다. 기껏 한 뼘 높아졌을 뿐인데 보이지 않던 것들이 저요 저요 얼굴을 드민다. 이럴 때 벤치는 무심의 의자가 아니다. 유심의 의자이자 보이는 의자다.
어제까지 무심히 보아 넘긴 덕진연못 시들어가는 연 줄기도 새롭다. 어둠이 밀려오는 저녁은 불합리하고 사악하고 부패한 세상을 조용조용 덮어가고 있다.
누구는 초저녁별에게 무심함을 탓하지만 우주의 인내심은 부처의 자비다. 만약 내가 신이었다면 맘에 들지 않는 이승을 수천 번도 더 갈아엎었을 것이다.
신은 아득하게 높은 하늘로 올라가 버렸거나 이승이 가장 잘 보이는 저승의 창가에 좌정해 계시거나 그것도 아니면 지상에 내려와 쉬는 의자, 생각하는 의자, 일하는 의자도 모른 체 인간들 사이에 섞여 진흙탕 놀이를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세상에는 벤치가 아닌 의자가 많다. 혼자 앉는 의자, 둘이 앉는 벤치, 셋이 앉는 소파… 사람들이 북적대는 날이면 그것도 태부족이지만 아무도 찾아오지 않을 때는 의자들이 무료하다는 듯이 하품을 한다.
어린 시절 교실 복도에서 의자를 거꾸로 들고 벌을 받아본 사람은 안다. 의자의 무게를 조금이라도 줄이는 방법을 궁리하기에 급급한 모습을 생각하면 웃음보가 터질 것이다.
요즘은 어디 가나 회전의자를 볼 수 있다. 전에는 사장실이나 고위 관리들의 사무실에 가야만 볼 수 있을 정도로 회전의자는 귀한 대접을 받았다. 회전의자는 그 시절, 사람들에게는 부와 권세의 상징이었다. 회전의자는 인생의 목표이자 꿈이었고 대단한 유혹이었다.
신분상승을 원하는 사람들이 목이 아프도록 올려다보는 것은 물론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났다는 확실한 증표가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돈 없고 빽 없는 사람들에게 동경의 대상이었다.
가난하다는 이유로 수모와 멸시를 당하고 서러워하던 사람들의 정서를 반영한 대중가요 ‘회전의자’가 공전의 히트를 쳤다. ‘빙글빙글 도는 의자 회전의자에 임자가 따로 있나 앉으면 주인인데 아~ 억울하면 출세하라 출세를 하라’ 얼마나 출세에 포원이 졌으면 회전의자라는 노래가 나왔을까?
당시의 비참한 현실이 눈에 선하다. 의자의 사명은 누군가를 앉히는 것이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의자는 물건에 지나지 않는다. 비어 있는 의자에 좋아하는 사람, 그리워하는 사람,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사람을 초대해 앉혀 놓고 밤이 깊도록 도란도란 정담을 나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생각할수록 몸이 찌릿찌릿하다. 그 순간을 위해 우리 폼 나게 살자. 미래가 우울하고 어둡고 현실이 고달프다 할지라도 벤치에 앉아 느긋함을 즐기자. 벤치야말로 진실과 정의의 표상이기 때문이다.
기대를 갖게 하고 삶을 자극하는 벤치마저 없다면 황혼이 얼마나 쓸쓸하겠는가? 아찔하다. 흔들의자는 지친 몸을 흔들어 주지만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반듯하고 견고한 벤치에 앉은 저녁 한때 내가 누구냐고 내게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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