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 원도연 원광대 디지털콘텐츠학과 교수. | | ⓒ 익산신문 | 2022년은 이리농림학교가 설립 1백주년을 맞이하는 해다. 지금 익산에서는 이리농림은 잊혀진 이름이다. 익산의 입장에서 애증이 교차하는 1백년의 역사를 우리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이름조차 사라져 버린 학교, 희미해진 영광의 기억들, 역사의 뒷전으로 물러나 버린 이리농림의 사람들, 이리농림 1백주년이 맞이하는 차가운 현실이다.
그러나 익산은 이리농림의 백년을 결코 그냥 보내서는 안된다. 이리농림은 익산의 도시형성사에서 가장 중요한 상징이었고 한때는 이리라는 도시의 심장과도 같은 곳이었다.
이리농림은 근대도시 이리의 심장이었을 뿐만 아니라 한국 농업의 심장이기도 했다. 지금 서울대의 모태가 되었던 수원농림과 영남지역 인재양성의 산실이었던 진주농림과 함께 이리농림은 한국 근대농업의 핵심이었다.
이리, 지금의 익산이 도시로서 역사를 시작한 시점은 이리역이 개통된 1912년이다. 이리와 익산의 발전은 농업지역으로서 이곳에 차지하는 전략적 위치가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즉 이리는 한국 근대농업의 중심지로 개척되었으며 실제로 일제강점기 동안 이리에는 근대농업의 핵심시설이 차례로 설치되었고 한일 양국의 근대사를 관통한 주요 인물들이 이곳을 주목했다.
그 과정에서 이리농림학교는 익산의 근현대사에 매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이리-익산의 근대농업을 구축한 3대 핵심요소는 익산 일대의 일본인 대농장과 수리조합, 그리고 이리농림이었다.
이 세 가지 요소는 이른바 근대농업 스테이션이라고 불릴만한 것이었다. 그 가운데서 이리농림은 농업교육을 중심으로 당시 최고의 선진교육 시스템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이는 식민지의 행정관료들과 테크노크라트를 양성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이리농림학교는 일본인 학생과 조선인 학생을 반반씩 모집하며 내선일체의 정신을 내세운 유일한 관립학교였고, 5년제 농업학교로 전문학교의 면모를 갖추었다.
이리농림학교는 개교와 함께 전국적인 명문이 되었다. 이리농림은 당대 최고 엘리트들이 모여들었고 그만큼 우수한 학업시설과 조직을 갖고 있었다.
이리농림은 당시로서는 매우 선진적인 농업기술을 익혔고 그 기술은 조선의 농업기술로 전파되었다. 이리농림에 맨 처음 설립된 학과는 농학과와 임업과였는데, 그 목표는 식량증산과 산림녹화에 있었다.
이리농림은 농업기술 뿐만 아니라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전학생 기숙사 생활을 통해 학생들을 엄격하게 통제했으며, 1930년대 중반부터는 학교를 군대식으로 편제하면서 병영화했다.
또 이리농림은 학교 그 자체로서 다양한 분야에 매우 우수한 인재를 양성했고 스포츠, 문학, 음악, 미술 등 각 분야에서 뛰어난 인재를 계속 배출했다.
특히 당시로서는 생소했던 축구, 야구 등에 능했고, 씨름은 조선을 넘어 일본 전체에서도 십여년간 우승을 독차지할 정도로 대단한 실력을 보여주었다.
해방과 함께 이리농림은 학교의 성격과 위상이 달라졌지만 일제강점기 이리-익산의 근대농업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이리농림이 차지하는 의미와 역할은 결코 적지 않았다.
이리농림이 가장 반짝거렸던 순간은 아이러니하게도 이리농림이 가장 어려웠던 시기인 1943년이었다. 일제가 태평양 전쟁을 벌이면서 이리농림은 전시체제로 들어갔다.
이때 이리농림 학생이었던 17살 나이의 소년 이상운은 화랑회라는 반일 독서클럽을 만들고, 이들과 함께 일제의 쌀 수탈을 상징했던 목천교를 폭파하는 무장투쟁 계획을 세웠다.
이곳에서 흘러간 쌀이 일제의 군수물품이 되는 것을 막고 조선의 의로운 청년들이 살아있음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이 사건은 불행하게도 미수에 그쳤고 이상운은 재학생 8명과 함께 체포되어 혹심한 고문을 당했다.
이상운은 결국 해방을 한 달도 남기지 않은 1945년 7월 17일에 옥에서 숨을 거뒀다. 그의 나이 18살이었다.
한국 독립운동사에 이렇게 처절한 투쟁이 얼마나 있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뜨거운 투쟁은 지금 이리농림학교 한 구석에 초라한 비석 하나로 남아있다.
그 이리농림이 드디어 1백주년의 역사를 맞이하는 것이다. 이리농림을 단지 하나의 학교로 본다면 우리가 굳이 그 이름과 명성을 기억하고 기록할 필요가 없을지 모른다.
이리농림이 남겨놓은 역사와 흔적, 특히 이상운 열사의 민족의식과 투쟁이 역사 속에 묻히고 사라져 버리는 것은 너무 불행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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