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 김복현 전 익산문화원장. | | ⓒ 익산신문 | 코로나로 고통을 당하고 있는 요즈음, 누구보다도 어린아이들에게는 아빠 엄마의 보살핌이 절대적이다.
아빠는 엄마 조금 뒤에 있는 사람이고, 엄마 어깨 너머로 자식을 보는 사람이라고 어느 시인은 말했다.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아빠는 자식과 거리감이 있는 존재라고 말하고 있다.
물론 자식과 같이 할 시간이 적어서 그랬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어찌되었든 아빠는 가정에서 항상 다정다감한 것보다는 다소 딱딱하고 거리감이 있는 존재임에 틀림없다.
아빠는 엄마 어깨 너머로 자식을 보는 남자라고 하니. 자식을 제대로 보려면 뒤꿈치를 들고 목을 빼야할 것이다. 아빠의 위치는 엄마 뒤로 참 외로운 위치에 있다. 몰론 외롭다고 건너 뛸 수도 없는 입장이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아빠’라는 시간을 통과하면 아버지가 된다.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한번 고모는 끝까지 고모이고 한번 삼촌은 끝까지 삼촌인데 왜 아버지가 되려면 아빠를 거쳐야 하는 걸까? 아빠라는 말의 탄생 과정을 우리는 한번쯤 음미할 필요가 있다.
아빠라는 말의 유래를 살피려면 아이 눈에서 출발해야 한다. 아이 눈에 아빠는 어떤 사람일까? 늘 잠깐씩 집에 들르는 손님과 같은 존재이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바쁜 사람이다.
그래서 아이는 아빠라는 말이 ‘바빠’에서 유래되었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하지만 아이는 자라면서 조금씩 알게 된다. 그 손님이 젖은 길, 거친 길, 막힌 길 마다않고 하루 종일 먼 길을 걸어 집에 들른다는 사실을….
그래서 그의 발바닥은 쩍쩍 갈라져 있고 군살이 박혀 있으며 군데군데 피멍이 맺혀있다는 사실을 아빠라는 말은 “바빠”가 아니라 아파에서 유래되었다는 사실을 시간이 흐른 어느 날 아이가 철들었다는 이유로 아빠를 아버지라 부르기 시작한다.
아버지! 낯선 호칭이다. 두 사람의 거리는 글자 하나 만큼 멀어진다. 정말 아빠를 아버지라 부르면 철이 든 걸까?
사실은 아버지를 다시 아빠라 부르고 싶은 순간 그 순간부터 철이 드는 게 아닐까? 엄마에 대해서도 우리는 알고 가야할 것 같다.
엄마는 자식과 아빠 사이에 놓인 사람이며 아빠가 자식의 허물을 볼 수 없도록 자신의 몸으로 자식을 반쯤 가리고 있는 사람이다. 또한 늘 앞뒤 다 살피느라 외로울 틈이 없는 사람으로. 아빠를 외로운 직업이라 규정 했지만 엄마라는 직업은 외로울 틈도 없다.
얼마쯤 자식의 허물을 가려야 하는지 날마다 고민해야 하며 자식의 허물이 바로 본인의 허물인양 가려야 한다. 조금이라도 덜 가리면 아빠가 속상해하고 너무 많이 가리면 자식이 우울해진다.
때론 뒤로 물러나 두 사람을 만나게 해줘야 하는데 그 때가 언제인지 가늠하기 어렵다. 위치 선정 하나만으로도 외로울 틈이 없는 엄마다. 엄마의 외로움은 내 앞에 자식이 보이지 않을 때 찾아온다고 한다.
어느 날 자식이 독립이라는 거창한 단어 하나 달고 엄마 곁을 떠난다.
그러나 그것은 자식에게나 독립이지 엄마에게는 분리다. 떠나는 게 아니라 떨어져 나가는 것이다. 팔 하나가 뚝 잘려나가는 것 같은 엄마는 이제 아빠의 시선을 가릴 필요가 없다.
비로소 외로울 틈이 생긴다. 각오한 일이며 인생사의 길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 순간 뒤돌아봤는데 아빠마저 보이지 않는다면 그 허전함은 차마 견디기 어려울 것이다.
아빠와 엄마의 존재가치가 매우 중요함을 새삼스럽게 알아야 한다. 자식이 엄마 시야에서 사라지는 날, 아빠가 꼭 해야 할 말이 있다. “이제 돌아 서세요. 나는 오늘도 당신 앞에 있어요. 당신 곁에 있어요.”라고 말하는 2021년이 되어 코로나도 침범하지 않고 소중한 가정을 지켜내는 삶이 되기를 기원해 본다. 2021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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