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 익산의병기념사업회 회장 이용희 | | ⓒ 익산신문 | 6월은 보훈의 달이며 1일은 의병의 날이다. 익산의병이 창의한 것은 1907년 10월 팔봉동 석암리 관동부락 앞 야산에서 257명의 젊은이들이 뜻을 모았다.
의병은 의병장 이규홍과 부장 박이환, 참모장 문형모 외 7개 지대로 조직되었다. 익산 의병 창의 소식이 전해지자 많은 젊은이들이 참여하게 되었다.
첫 전투는 완주군 화산면 가금제, 2차는 진안 용담에서, 3차는 금산군 남이면 백령재에서 혹한 속에서 전투가 이루어졌다. 세 차례 전투에서 왜병 129명을 사살했고 아군도 85명이 전사했는데 이때가 1908년 정월 초순이었다.
혹독한 추위에 열악한 장비, 일제의 회유로 의병은 전의를 상실했고 잔여 세력이 4월 21일 현 대전시 식장산 장군바위 아래서 의병을 해산하고 지하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이규홍 의병장 체포에 혈안이 된 일제는 4,000원 현상금(당시 소 한 마리 10원)으로 압박하고 있었다.
오랜 지하 활동에 지치고 국내 은신에 한계를 느낀 이규홍은 1918년 상해로 망명하여 임시 정부에 참여한다.
이때 고종 황제 밀서를 가지고 파리로 떠나는 김규식의 여비로 임정에 1,300원을 지원한다.
그 후 1920년 3월경 만주 간도의 사관원 양성소의 김좌진 장군을 만나 군자금 3,000원을 지원했다.
일부 학자들은 이 자금이 1920년 9월 청산리 전투에 군자금으로 쓰였다고 말하고 있다.
이규홍 의병장은 1920년 6월경 귀국하여 대전 동구 사한동 송창재·송덕재씨 댁에서 은신 중 1924년 2월 8일 서울에서 체포되어 4개월간의 혹독한 고문으로 사경에 이르자 석방되어 고향의 동생 이기연씨 댁에서 투병 중 1929년 6월6일 48세로 21년간의 구국의 일념으로 살았던 고난과 시련의 생애를 마감했다.
이규홍 의병장과 아버지 이기영 어른, 동생 이규연씨 3부자에게 정부는 건국훈장, 건국포장, 대통령 표창을 추서했다. 그리고 익산 의병에 참모로 참여한 박이환, 문형모 선생 외 9명에게도 건국훈장을 추서했다.
순국 의병들께서 우리에게 남겨주신 것은 애국과 희생인 의병 정신과 함께 나라가 위기에 처할 때 국민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 것에 대한 정확한 정답을 제시해 주었다.
오늘을 사는 우리 익산 시민은 의병창의 113주년을 맞이해 두 가지 사업을 완수해야 한다.
첫째, 2017년 5월 10일 국가보훈처 현충시설 심의위원회에서 결의한 익산의병 기념사업을 하루속히 착수하여 끝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익산시장은 국가보훈기본법 제5조에 따라 시비 부담금을 지원해줘야 하며 기념사업회 자부담 모금에도 적극적인 역할을 해줘야 한다.
둘째, 의병정신의 계승과 발전을 위해 세우는 기념사업 안에 설치되는 의병학교는 국내에서 처음으로 세워지는 청소년과 국민을 위한 의병정신 교육기관이다.
한반도는 분단 72년을 맞이하고 있고 지금도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의 각축장이 되고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청소년과 국민들이 이 땅에 주인의식을 갖도록 해야 한다.
그 정신의 모델을 의병정신(애국과 희생)에서 찾아야 한다. 이 일을 위해 전북도지사, 전북교육감, 익산시장께서는 적극 협조해서 의병사업회가 소임을 다하도록 협력해야 한다.
국민의 역사의식과 책임의식이 확립될 때, 청소년들이 의병정신으로 무장될 때 국가와 지역발전에 밑거름이 될 수 있음을 확신하며 의병창의 113주년을 맞이해 익산의병 기념사업에 많은 시민의 관심과 참여를 간곡히 호소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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