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 ↑↑ 정성수 시인 | | ⓒ 익산신문 | | 벚꽃이 핀 것은 기적이었다. 죽었다고 생각한 벚나무에서 꽃이 피었기 때문이다. 지난여름 태풍을 견디지 못하고 벚나무는 쓰러졌다. 쓰러진 벚나무는 톱날을 받아들였다. 울타리 가에 적재되어 어디론가 실려 갈 때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꽃이 핀 것은 도막 난 벚나무가 아니라 밑동이었다. 밑동은 땅속으로 뿌리를 디밀고 물을 빨아올렸던 것이다. 신기하게도 잎을 틔우고 꽃을 피워 낸 것이다. 봄도 아닌 이 가을에… 철이 지났음에도 포기하지 않고 꽃을 피운 투혼이 눈물겹다. 두근대는 가슴으로 다가가 꽃잎을 바라보자 겸연쩍다는 듯이 미소로 화답한다.
벚나무는 수십 년을 우리 집 울타리 가에서 오가는 사람들에게 봄여름가을겨울을 알렸다. 봄에는 튀밥 같은 꽃을 피우고, 여름이면 짙은 그늘 속으로 동네 아이들을 불러들여 숨바꼭질이나 땅뺏기 놀이를 시켰다. 가을이면 한쪽 어깨를 내주어 콩단이나 깻단을 기댈 수 있게 했다. 겨울이면 찬바람에 몸을 움츠리기도 하고 수천수만의 흰나비 같은 눈송이들을 넓은 가슴으로 받아들였다.
벚꽃을 바라보면 때 묻은 영혼도 순결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하얀 꽃잎과 안으로 붉은 빛은 미향이 온몸에 스며들어 마음마저 향기로워지는 것이다. 벚나무는 자신의 고유함을 지키며 생을 아름답게 가꾸는데 우리는 향기는 고사하고 허구한 날 시기와 질투가 끊이지 않는다고 생각하니 벚나무에게 못내 부끄럽다.
봄이 되어 흐드러지게 핀 벚꽃을 보면 화사함에 감탄한다. 그러나 비라도 내리면 속절없이 지고 만다. 떨어진 꽃잎이 허망한 것이 아니라 빈 가지를 바라본다는 사실이 허망하다.
더 오래 아름답게 피어있기를 바라지만 궂은 날씨는 벚나무를 힘들게 하고 끝내는 꽃잎을 버리게 한다. 우리의 인생도 시간 따라 세월에 따라 변한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젊은 시절과 다른 모습으로 바뀌어가는 것은 당연하지만 변화에는 두려움이 있다.
고목이 된 벚나무를 보는 동안 가슴 한구석이 아려왔다. 바짝 마른 가지는 한때 온갖 풍상을 겪으면서 운치를 더해 예술적 미를 뽐내기도 했을 것이다. 수많은 꽃을 피우기 위해 얼마나 오랜 시간 속울음으로 인내를 했는지 알아주지 않아도 벚나무는 묵묵할 뿐이다.
가지 끝에 앙증맞은 꽃봉오리는 침묵으로 자신의 내면을 가득 채워 꽃을 피웠다. 꽃을 피워 놓고도 벚나무는 절대로 뽐내지 않는다. 인간들이 바라봐 주는 것만으로도 행복해 한다. 탐욕도 구차함도 다 내려놓고 자신의 모습 그대로 겸허히 한생을 살아간다. 벚꽃들은 며칠 동안 화려하게 피었다가 먼 길 떠날 채비를 한다. 속절없음은 인간의 생과 다를 바 없으나 벚나무의 여정은 예사롭지 않다.
누워서도 신음소리 한 번 내지 않고, 땅속으로 뻗은 가느다란 뿌리 끝에 온 힘을 다 쏟아 남은 생을 부지하는 벚나무는 어제의 푸른 기억을 미련 없이 지워버렸다. 지금은 치열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힘주어 말하고 있는 듯하다. 바라볼수록 벚나무는 달관의 경지에 오른 듯한 초연함이 있다. 저 모습은 함부로 몸과 마음을 내던지거나 버리는 인간들을 향한 절규 아니면 질책이다.
누구에게나 빛깔이 다를 뿐 저마다 고통이나 보여주기 싫은 상처가 있다. 가시에 찔리는 것 같은 고통이야말로 삶을 꽃 피울 수 있는 인생의 자양분이다. 크거나 작은 상처일지라도 욱신거리기는 마찬가지다.
계절과 순리에 따라 제 빛깔과 제 향기를 잃지 않고 삶에 대한 열정을 추구하는 벚나무는 생명이 있다는 것에 감사한다. 그것이 얼마나 소중하고 아름다운지 힘겹게 핀 몇 송이 꽃으로 증명하고 있다.
산다는 것이나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일이라는 삶의 지혜를 일깨워 주고 있다. 고목으로 쓰러진 벚나무처럼 누워서 꽃을 피워낸 열정과 희망을 움켜쥐고 살다 보면 어느 날인가는 인생에서도 열매를 맺지 않을까? 탐스럽고 군침이 도는 그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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