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 ↑↑ 이봉기 피아니스트 | | ⓒ 익산신문 | | 돌이켜 보면 피아노를 인생의 동반자 삼아 동고동락 한 지도 어언 60년의 세월이 흘렀다.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하루 6시간 이상을 연습에 몰두하며 살아온 세월이다.
60년 전에 군산에서 처음 피아노를 시작했을 때에는 피아노라는 악기 자체도 생소했을 뿐더러 직접 피아노 소리를 듣는다는 것 자체가 신기하던 때였다.
어린 나이였음에도 피아노와의 끊을 수 없는 인연이 있었던 것인지 처음 그 소리를 듣고 전율을 느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부모님을 졸라서 정식으로 피아노에 입문하면서 하루하루 즐거움이 쌓여갔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고난의 연속이었다. 손가락 모양은 어쩌고, 셈여림은 어떻고, 그런 이론수업이 그 당시에는 어찌도 그리 어렵게 느껴졌던지, 지금 생각해보면 저절로 웃음이 나는 일이다.
초등학교 6년 동안 중학교 입시준비를 하면서도 피아노에 대한 나의 애정은 변함이 없었다. 그 당시에도 어렴풋이 느꼈지만 음악공부는 타고난 재주를 지닌 천재들이나 하는 일로 여겨졌는데 나는 피아노를 계속하기 위해서라도 중학교 입시공부를 더 열심히 할 수밖에 없었다.
중학교에 입학한 후에는 모짜르트, 베토벤 등 전설적인 작곡가들의 수준 높은 작품을 공부한다는 것이 참으로 어려운 일이였다. 그때 당시만 하더라도 모짜르트, 베토벤을 공부하고 연주한다는 것이 흔치 않은 일인데다 시골에서는 좋은 스승을 찾기란 더더욱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피아노 공부가 힘들었던 만큼 보람도 컸었다. 주변의 친구들과 선생님들은 그런 나를 언제나 신기하다는 듯이 봐주셨고 또한 많은 격려를 보내주셨다. 중학교 때의 나의 목표는 당연히 세계적인 피아니스트가 되기 위해 서울예술고등학교에 입학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나의 첫 번째 도전은 커다란 좌절로 돌아왔다. 당연한 일이었겠지만 시골에서 혼자서 피아노를 공부해서 서울예술고등학교에 진학한다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처럼 어려운 일이었던 것이다.
그런 실망감을 뒤로 하고 고향에 있는 고등학교에 진학하여서도 나의 피아노에 대한 열정은 식지 않았으며 입시준비와 함께 피아노 연습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하지만 시골 고등학생의 피아노 공부는 난관의 연속이었다. 그 때까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수준 높은 곡들을 연습하면서 수많은 어려움에 봉착했었다.
예를 들어 쇼팽이나 리스트 등의 낭만곡을 공부할 때는 인간으로서 상상도 할 수 없는 멜로디와 화성에 어쩌면 천상의 소리가 아닐까 여겨졌으며 어떻게 그런 소리를 낼 수 있는지 나 자신에 대한 의심이 갈수록 쌓여 갔었다.
이처럼 시골의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입시준비를 하면서 피아노 공부를 병행한다는 것은 역시나 어려운 일이었으며 결과적으로 서울의 유명대학에 진학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였다.
입시결과는 낙방의 연속이었고 결국 지방대학에 진학을 했지만 나의 피아노에 대한 열정만큼은 식지 않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서울의 유명 대학원에 진학한 후에는 훌륭한 지도교수님을 만난 것도 큰 행운이었지만 공부하는 분위기는 그때까지와는 다르게 훨씬 좋은 환경이었다.
대학원을 졸업한 후에도 나의 피아노에 대한 갈망은 꺼질 줄을 몰랐으며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독일 유학길에 올라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도 도전할 수 있는 기회도 가졌었다.
그 당시에는 며칠씩 밤을 새며 피아노 연습을 할 때가 많았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때의 피나는 연습 시간들이 나로 하여금 음악을 제대로 이해하고 지금까지도 현역으로 활동할 수 있게끔 만든 밑거름이 되지 않았나 싶다.
예술가의 길, 피아니스트가 가야할 길은 고난의 길이다. 위대한 음악의 성인 베토벤이 말했듯이 ‘끊임없이 연구하고 발전하고 죽을 때까지 도전하는 자만이 인류를 구원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행복을 줄 수 있다’는 교훈은 아직도 유효하다.
나는 항상 음악과 나의 삶에 대해 진지하고자 하며 그 과정 속에서 의미를 찾고자 한다. 한국 최초로 50개 도시 순회 피아노 독주회라는 커다란 도전을 일흔을 앞둔 이 시점에 시작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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