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 ↑↑ 한승진 황등중 교사 | | ⓒ 익산신문 | | “혁명이 문학적 몽상에 의해 이루어지는 일은 절대 없다. 혁명은 문학적인 것이 아니다. 다르다. 결코 다르다. 문학이야말로 혁명의 본질이다. 혁명은 문학으로부터만 일어나고, 문학을 잃어버린 순간 혁명은 죽는다.”
일본의 철학자 사사키 아타루가 쓴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이라는 책에 나오는 구절이다. 문학이야말로 혁명의 본질이라는 저자의 말 자체가 매우 혁명적이다. 도대체 읽고 쓰는 문학 행위가 어떻게 혁명일 수 있을까?
그는 마르틴 루터의 종교혁명을 예로 들어 문학이 혁명의 본질임을 증명했다. 당시 교회가 부패할 대로 부패해졌을 때, 루터는 성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에 들어가 성경을 읽었다. 루터는 이상할 정도로 성경을 읽고 또 읽었다.
라틴어도 그리스어도 히브리어도 공부해서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읽었다. 그리고 마침내 당시 부패한 세상은 아무런 근거가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루터는 그렇게 읽고 읽고 또 읽다가, 그 유명한 95개조의 의견서를 썼다. 예술, 문학, 정치, 법, 신앙, 종교 모든 분야에 글을 써서 127권의 저작을 남겼다. 그래서 예술, 문학, 정치, 법, 신앙, 종교, 그 모든 것이 변했습니다. 대혁명이 성취된 것이다.
중세와 현대가 다르고, 시대 상황과 사람의 인지 정도가 다르다고는 하나, ‘문학, 혁명, 루터’에 대한 사유는 세상의 변화가 어디서 오는가를 성찰하게 한다. 혁명을 혁신으로 바꾸어 이해해 본다. 문학이 과연 세상을 변화시킬까? 읽고 쓰는 행위가 진정 변화와 혁신의 본질일까? 결국 읽고 쓴다는 것은 앎이 밝아진다는 것이다.
공자가 책 묶는 가죽 끈이 세 번이나 끊어질 정도로 '주역(周易)'을 읽은 것이나, 주자가 눈이 멀도록 경서를 읽고 쓴 것이나, 루터가 성경을 읽고 또 읽으며 127권의 저작을 남긴 것이나, 이는 모두 인지가 밝은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본질적 행위로 같다. 인지가 밝아지면 마침내 혁신이 일어난다. 읽고 또 읽고, 쓰고 또 쓰지 않고서 변화하는 것은 세상에 없다.
발명가 에디슨은 학교에서 퇴학당하고 디트로이트 시립도서관의 책을 거의 다 읽었다. 읽고 읽고 또 읽고 나니 그 에너지가 발명으로 터져 나왔다. 에디슨은 세상을 바꾸었다. 그가 바꾼 세상의 본질은 읽고 또 읽은 문학이었다. 혁신은 손쉽게 얻을 수 없다. 인지가 밝은 세상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고 몇 가지 제도 개선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혁신을 부르짖는다고 될 일은 더욱 아니다. 반드시 이러한 본질적 행위의 누적과 시대정신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한 사람의 열 걸음보다 열 사람의 한 걸음이 훨씬 어렵다. 그러나 함께함의 가치와 의미와 효과는 엄청나다. 열 사람, 백 사람의 한 걸음은 열 사람, 백 사람의 밝음과 연대로서만 가능해진다. 혁신은 넓고 깊게 멀리 가는 길이다. 혁신은 근본정신을 바탕으로 시대에 맞게 개정해서 미래를 열어나가는 일이다. 이를 위해 집단 지혜가 어우러지는 밝음으로 어제를 거울삼아 내일을 기대하는 온고지신(溫故知新)이 진행되어야 한다.
개혁과 혁신은 완료형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다. 가파르게 달려온 역사를 접고 혁신 과제로 삼자. 넓고 깊게 멀리 가기 위하여 다시 마음을 추슬러 보자. 읽고 또 읽자. 책 속으로 뛰어들다보면 길이 열릴 것이다.
우리나라는 사계절이 저마다의 흥겨움으로 멋을 내는 고운 자연을 접할 수 있는 축복의 땅이다. 산과 들은 계절마다 고운 자태를 뽐내면서 우리를 유혹한다. 이런 시기에 실내에서 책을 읽고 있는 것은 고리타분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렇다면 책을 들고 산과 들로 나가면 어떨까? 가끔 화창한 날씨를 마다하고, 책을 보자. 문학 읽기를 방해하는 가장 큰 적은 날씨나 바쁜 일정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의지라는 걸, 명심하면서 말이다.
귀한 마음에 귀한 책들로 저자들이 전하는 삶의 깨달음을 음미하고 그 안에 담긴 의미를 되새기면서 공감도 하고 반대의견도 드러내면서 펼치는 적극적인 독서로 우리 삶을 더욱 풍요롭고 다채롭게 만들어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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