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 ↑↑ 이용희
(사)익산의병기념사업회 회장 | | ⓒ 익산신문 | | 다가오는 6월1일은 정부가 정한 의병기념일이며 익산의병 창의 111주년이 되는 날이다. 나라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지 못했던 가장 안타까운 사건이 1905년부터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1910년 사이에 일어났다.
일본은 청일·러일 전쟁에서 승리하고 미일조약으로 아시아에서 그야말로 독무대였다. 이때 조정은 파벌싸움과 내분으로 혼란이 계속되는 사이 민초들이 국난의 위기에 처한 조국을 구하겠다고 일어선 것이 의병전쟁이다.
훈련되지 않은 백성들이 무기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일본 정규군과 맞서 싸우겠다는 참으로 무모한 도전 같았다.
개인적인 안일을 포기하고 나라와 백성을 위하겠다는 한 뜻으로 생명을 내던지는 선조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무엇을 생각할 것인가?
국권회복을 위해 싸운 항일투사 가운데 익산의 이규홍 의병장을 빼놓을 수 없다.
익산의병은 1907년 11월 익산 팔봉면 석암리에서 이규홍 의병장을 비롯한 257명의 피 끓는 청년들로 창의됐다.
1907년 11월 6일 익산 관동에서 출병식을 할 때 이규홍 의병장은 “왜군은 힘으로 싸우지만 우리는 의로써 싸운다. 의는 힘을 이긴다”고 외쳤다.
5개월간 세 차례에 걸친 왜병과의 전투에서 의병 85명이 전사하고 왜병 129명을 사살했다. 눈보라치는 추운 겨울 날씨 속에서 악전고투한 의병은 열악한 장비로 전의를 상실했고 전열을 정비한 후 대전시 동쪽 식장산 중턱 장군바위 아래서 의병을 해산했다.
조국의 참담한 현실과 전의를 상실한 의병의 모습을 보며 이규홍 의병장은 눈물어린 심정을 한 편의 시로 남겼다. ‘창을 던지고 빈 산에 앉아있으니 흐르는 눈물이 옷깃을 적신다. 저 슬피우는 두견새는 나의 심정을 알아주는 것 같구나’
국내에서 투쟁에 한계를 느낀 이규홍 의병장은 상해로 망명했다. 그곳에서 그는 임시정부에 참여, 독립청원서를 가지고 파리로 떠나는 김규식에게 여비 1300원(시가 1억원)을 지원했고 만주에서 김좌진 장군을 만나 3000원(시가 3억원)을 독립군 양성자금으로 출연했다.
그 후 국내로 들어와 항일운동을 계속하던 이규홍은 1924년 2월 8일 서울에서 체포돼 14개월간 혹독한 고문으로 사경을 헤매다가 1929년 6월 향년 48세로 구국 투쟁의 삶을 마감했다.
올해 의병 창의 111주년을 맞이했다. 정부는 의병에 참여한 10명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고 이규홍 의병장이 의병활동하며 쓴 ‘오하일기’를 기초로 '익산의병전쟁사'를 발간토록 했다.
정부는 지난해 5월 익산의병기념사업(현중시설)에 사업비 98억원을 투자 시행하도록 승인했다.
국비를 비롯한 시·도비와 시민의 모금(18억원)으로 익산에 기념사업을 추진해 자랑스러운 의병정신(애국?희생)을 시민과 청소년들에게 계승?발전시켜야 한다.
익산시민은 선열께서 우리에게 남겨주신 자랑스러운 충절의 고장 익산에 대한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시민 화합과 익산발전에 초석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순국선열은 나라와 민족을 위해 생명과 재산을 바쳤다. 이제 우리 시민은 순국선열들의 고귀한 희생을 기념하기 위해 마음과 정성을 모아야 할 때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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