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 ↑↑ 정성수 시인 | | ⓒ 익산신문 | | 지난겨울에 만물이 생명의 종말을 고하는가 싶더니 봄이 오자 새 생명으로 태어난다. 돌고 도는 계절 속에 시작과 끝이 함께 있다는 창조 원리와 영면이 경이롭다. 봄은 만물이 소생하고 생동하는 생명의 계절이다. 대지에 봄비가 내리면 새싹이 돋기 시작한다. 새싹은 생명의 시작을 알리는 봄의 희열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물의 근원이자 새로운 시초라고 한다. 봄은 환희의 여신이자 생명의 여신이다, 생생육육(生生育育)으로 지상 곳곳에 꽃을 피운다. 땅에 씨앗을 뿌리면 푸른 새싹이 난다. 나뭇가지마다 신생의 잎이 돋고 아름다운 꽃이 핀다. 그래서 봄이다.
봄은 꽃으로 말한다. 나무가 아직도 겨울잠에 취해 있을 때 매화는 봄을 알리는 꽃 중에도 가장 이르게 피는 꽃이다. 청아한 꽃과 맑은 향기는 고결한 선비 같다. 매화는 가난해도 향기를 파는 일이 없다고 하여 지조를 상징하기도 한다.
낮은 산 여기저기에 핀 분홍빛 진달래가 화사한 얼굴로 봄을 맞이한다. 진달래는 두견화(杜鵑花)라고도 한다. 두견새가 밤을 새워 피를 토하면서 울 때 그 피가 꽃을 분홍색으로 물들었다는 전설에서 유래한다. 진달래꽃은 화전(꽃부침)을 만들어 먹기도 한다. 화전은 허기를 달래는 간식이라기보다는 눈으로 먹고 입으로 맛을 느끼는 별미다. 이 같은 여유와 낭만은 우리 민족의 자랑이자 자존심이다. 진달래가 인간들의 시선을 끄는 동안 우리도 질세라 산수유와 생강나무가 가지마다 꽃을 피워낸다.
봄을 춘궁기라고도 한다. 한자어인 춘궁기(春窮期)는 보리가 익을 때까지 기다리는 시기로 보릿고개라고도 한다. 묵은 곡식은 다 떨어지고 보리는 아직 거둘 때가 되지 않아서 먹을 것이 없어 어렵고 힘든 때다. 보리가 익어 수확할 때까지 주로 갱죽(나물죽)이나 칡뿌리 또는 소나무 속껍질 등 초근목피(草根木皮)와 쌀겨 등을 먹는 것이 전부였다. 요즘 젊은이들은 춘궁기라는 말 조차 낯설어 한다. 예전에는 해마다 찾아오는 봄의 아픔이었다.
봄에도 아픔은 있다. 봄에 왔다가 봄에 간 사람이 있다. 해마다 봄이 되면 봄꽃 중에서 라일락을 좋아한다는 사람이 생각난다. 라일락 앞에서면 라일락이 된 것 같다는 그 사람은 라일락 같은 사람이었다. 그해 봄, 흐드러지게 핀 라일락 앞에서 눈물을 펑펑 쏟았던 그 사람은 내게 고백했다. 라일락향기가 이처럼 슬픈 것인지 미처 모르고 살아 왔노라고, 이토록 봄을 온몸으로 느껴 본적이 없었노라고 눈물을 훔치며 엷은 미소를 띠던 사람이었다. 4월 후반 쯤 피는 라일락은 짙은 녹색을 띠는 잎들이 커다란 원추꽃차례로 피는 꽃으로 은은한 향기는 매력을 더해 준다. 요즘도 라일락을 대하면 꿈 많던 학생시절의 그 사람이 보인다. 지금쯤 어느 하늘에서 나처럼 봄을 만지작거리고 있는지? 생각할수록 짠하다.
한생을 살고 간 것들의 설음을 녹여주는 눈물은 카타르시스로 새로 시작하는 만물을 위해 제 몸을 풀어놓는 진실이자 순수다. 봄비는 뜨거운 눈물이다. 봄비는 키가 한 뼘씩 자라게 하고 마음을 한자씩 더 깊어지게 하는 통과 의례인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봄은 겨우내 움츠렸던 자연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는 활기를 불어넣어주고 세상을 아름답게 바꾸어 준다. 뿐만 아니라 우리들에게 희망을 약속한다.
봄은 처녀다. 그렇기 때문에 부드럽다. 봄은 3가지 덕을 가지고 있다. 생명과 희망과 환희다. 생명이 자라는 것처럼 아름답고 신비롭고 놀라운 일이 없다. 희망이 없는 삶은 삶이 아니다 죽지 못해 사는 것이다. 환희는 기쁨이다. 기쁨을 모르는 사람은 금수만도 못하다. 봄의 3덕이야 말로 봄을 한마디로 말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화가들은 봄들녁으로 나가고 시인들은 봄을 노래한다. 선인들이 봄바람을 ‘혜풍(惠風’이라고 부른 것도, 고호가 ‘씨 뿌리는 사람’을 그린 것도 요한 시트라우스가 ‘봄의 왈츠’를 작곡한 것도 다 봄이 있었기 때문이다.
봄꽃 중에 들꽃을 빼놓을 수 없다. 들꽃은 미미한 존재다. 겸손해야 만날 수 있는 꽃이 들꽃이다. 그 존재를 확인할 때 마음은 기쁨으로 가득해 진다. 돌보고 가꾸는 사람이 없어도 봄이 오면 소리 없이 꽃망울을 터트리며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다. 민들레, 꽃다지, 산괭이눈, 얼레지, 씀바귀, 냉이, 노루귀, 제비꽃, 광대나물 등은 허리를 굽히거나 무릎을 꿇어야 얼굴을 볼 수 있는 꽃이다. 봄꽃이다.
예전에는 먼저 매화 벙글고, 진달래 피고 다음에 개나리 피고, 목련 피고, 벚꽃 피고, 지면 철쭉 피었다. 그러나 요즘은 순서도 없고 철도 모르는지 한겨울에도 개나리가 피고 철쭉이 꽃망울 맺는다. 꽃피는 질서도 없어졌다. 한꺼번에 확 피어 우리를 놀래게 한다. 그러나 봄은 어둠이 아니고 밝음이다. 봄은 슬픔이 아니고 기쁨이다. 저기 봄이 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