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 김복현 익산문화원 고문 | | ⓒ 익산신문 | 연일 지속되는 이상기후와 북한의 핵위협으로 하루도 편안한 날이 없지만 역사는 쉬지 않고 숱한 기록과 자료를 남기면서 가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익산에서도 역사 재조명이 지속되고 있다. 문화재청은 쌍릉의 피장자 확인과 무덤 축조방식의 실체를 밝혀야겠다는 계획으로 1917년 일본인에 의하여 발굴된 지 100년이 지난 지금 다시 발굴을 한다고 한다.
하지만 백제 역사에 대하여 1400년 전에 축조된 쌍릉은 백제의 문화 방식대로 만들어졌을 것이고 또한 왕릉에는 당시 피장자의 소품과 유물이 함께 매장되어 있을 것이라고 믿어온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쌍릉은 그동안 도굴꾼들이 눈독을 드리면서 시도 때도 없이 왕릉에 구멍을 뚫어 왕릉 속에 있는 유물을 탈취해 온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관리가 소홀했던 시기에 흔하게 볼 수 있었던 일이다.
우리는 늘 쌍릉을 생각할 때 역사서에서 배우고 들은 대로 백제의 무왕과 선화공주의 묘소라는 것에 대하여 의문을 던지지 안했던 것도 사실이다. 역사는 말하고 있다. 고구려 신라 백제의 삼국시대에 문명문화가 가장 앞섰던 백제의 문화는 일본에서 그 꽃을 일부 피우고 지구상에서 사라지며 패망한 나라의 운명으로 종지부를 찍기에 백제역사 문화의 흔적은 매우 미미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쌍릉의 피장자에 대해서는 당연히 무왕과 선화공주로 인식하는 역사문화 속에서 살아왔다. 그리고 익산이 역사고도로써의 큰 비중을 차지해온 문화유산이 쌍릉이기도 하였다.
쌍릉의 역사자료는 미륵사지 석탑에서도 입증되어 왔으며, 왕궁 유적지에서도 무왕의 치적을 우리는 살필 수 있었음을 상기한다면 쌍릉의 문화적 의미는 매우 크다고 말할 수 있다. 잠시 지난날 치욕의 역사 한 페이지를 들여다보아야 할 대목이 있음을 지적하면서 치욕의 역사로 인하여 우리의 역사가 일본인에 의해 결정적으로 훼손되었다고도 볼 수도 있다.
치욕의 역사는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庚戌國恥)로 나라를 일본에 빼앗기는 상황이 되어 1945년 8월 15일까지 36년간 역사문화는 물론 삶의 문화 전부를 빼앗기는 기구한 운명에 처하게 됨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아픈 역사가 시작된 지 7년 후인 1917년 일본인 “야쓰이 세이 이치” 일행은 한국의 고적조사 사업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의 쌍릉을 파헤치고 쌍릉의 매장문화재를 그들의 관점으로 조사를 당하는 운명에 처한다. 그래서 우리는 무덤 안에 있는 소중한 매장 문화재를 직접 확인도 하지 못한 채 귀중한 유물은 일본인의 손아귀에 들어갈 수밖에 없는 운명이 되어버린 쌍릉이 되었다고 볼 수밖에 없었다.
이에 따라 그리 소중하지 않은 유물들만 다시 매장되었을 것이며 1917년 현재 일본인에 의해 쌍릉이 발굴되었던 역사만 남긴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10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소중한 쌍릉을 또다시 파헤쳐 소중한 매장 문화재를 우리의 눈으로 확인하려하고 있다.
익산의 쌍릉은 어떤 왕릉인가? 대왕 묘와 소왕 묘로 전해지고 있다. 대왕 묘는 무왕 무덤으로 지름이 30m 높이5m의 규모이고, 소왕 묘는 선화공주의 무덤으로 지름 24m 높이 3.5m의 큰 무덤이며 내부는 전형적인 백제 왕릉의 형식인 횡혈식 석실묘(굴식 돌방무덤)로 알려져 있을 뿐이다. 사실여부를 잘 알 수 없는 상태로 1400년의 역사를 간직한 왕릉으로만 여겨왔으며 지금까지 알려진 대로 쌍릉의 모습이 다시 조명될지? 그렇지 않고 단순한 큰 무덤으로 조명될지? 우리가 지금까지 보지도 듣지도 못한 새로운 왕릉으로의 모습일지? 아니면 단순한 무덤의 형식만 왕릉이지 매장문화재의 가치가 미비한 묘소로 우리 앞에 다가올지? 궁금하기 그지없다.
무왕의 무덤이 아니라는 말도 있으니 더 궁금하게 하고 있다. 이런 궁금증 때문인지 몰라도 역사는 항상 역사 사실 그대로 인정해가면서 새로운 자료나 역사적 사실을 찾아야 한다는 말이 있다. 쌍릉을 파헤치고 난 후 알고자 했던 새로운 역사유물들이 미약하다면 파보지 않고 역사에서 인정해왔던 사실들이 허무하게 될 지도 모르는 두려움이 있는 것도 사실이 될지 모른다.
100년 전 일본인들이 쌍릉을 파헤치고 난후 소중한 문화재는 사라지고 문화적 가치가 미미한 자료만 다시 매장되었을 것이라는 예측을 해보면 100년 후 다시 발굴을 시도한 쌍릉의 역사적 가치는 무엇으로 보상받을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가는 것도 사실이 될 것이다.
따라서 발굴의 효과가 크지 못하고 무왕릉이라는 역사적 가치에 근접하지 못하는 결론이 나올 경우 1400년 전 익산에서 태어나 왕이 된 무왕에 대한 역사적 인식이 떨어질 것으로 전망되어 익산의 역사문화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는 모습이 되지 않을까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역사서에서 전해 내려오는 대로 믿고 가는 길이 어쩌면 역사를 더 견고하게 하는 길이라고 감히 말하고픈 생각이 든다. 오직 쌍릉 발굴사업을 계기로 익산의 역사가 재조명 받는 행복한 시간이 우리 앞에 전개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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