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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늘고 게으른 비가 오래도록 온다 숨어 있던 지렁이 씨 몇몇이 기어 나왔다 꿈틀꿈틀 상처를 진흙탕에 부벼댄다 파문이 인다 시커멓고 넓적한 우주에서 이 지구는 수박씨보다 작고, 지구상에서 가장 작은 지렁이 씨의 꿈틀거림도 파문을 만든다 광활한 우주를 지름길로 떠돌다 돌아온 빗방울에는 한세상 무지렁이처럼 살다 간 자들의 눈물이 포함되어 있다 그 눈물이 파문을 만든다 빗방울도 파문을 만든다 이토록 오랜 비도 언젠가는 그치리라 …그러면? 그러면 지렁이 씨들의 꿈틀꿈틀, 생애 전체가 환부인 꿈틀꿈틀 그들의 필적을 바라보겠고, 시 쓸 일이 없겠다
지렁이는 피부가 호흡기관이라 꿈틀거려야 숨을 쉰다. 빛을 싫어하고 흙을 옥토로 바꾸는 일을 한다. 비가 오면 구멍 밖으로 나와 상처를 진흙탕에 비벼대고 비가 그치면 햇빛 아래 꿈틀꿈틀 말라죽는다. 그 꿈틀거림으로 지렁이는 평생의 시를 쓰고 자기의 필적을 땅에 남긴다. 자기 고통의 스트립쇼를 다 보여주고야 마는 시인 지렁이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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