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 정우식 (이일여고 교사 / 사)전북청소년교육문화원 이사장) | | ⓒ 익산신문 | 배산은 해발 79m 높이의 야트막한 산이지만, 들판 가운데 우뚝 솟은 데다 경치도 빼어나 익산시민들의 휴식처로 예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아온 익산의 상징이라 할 만한 곳이다.
필자는 익산에서 나고 자란 사람은 아니지만 23년여 동안 이곳에서 교사로 아이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익산 사랑만큼은 누구 못지않다고 여기며 살아오고 있다. 그러나 늘 마음에 걸렸던 것 중 하나가 자연스럽지도 않고 역사・문화적 근거도 희박한 배산의 이름이다. ‘배산’의 순우리말 옛 이름은 ‘잣뫼’이다. 이 정겨운 이름을 되찾아 쓰는 운동을 범시민적으로 벌여 나갈 것을 제안하고자 한다.
배산은 역사적으로는 여러 문헌에 옥성산(沃城山), 백산(柏山), 척산(尺山), 우령대(禹靈臺), 우락암(于樂巖, ?樂巖), 연주산(聯珠山, 連珠山) 등의 이름으로 나타난다. 연주산은 두 산봉우리가 이어진 모습에서 나온 이름이며, 우령대, 우락암은 정상에 큰 바위가 있어 ‘우렁바위(대)’의 한자식 표기라는 주장이 있다. 이런 이름들은 배산이라는 이름과는 직접 관련이 없으므로 여기서는 논외로 한다.
‘배산’은 결과적으로 ‘잣뫼’를 잘못 옮긴 이름이다. 언제부터 배산으로 부르게 됐는지는 정확하지 않으나, 비교적 후대에 한자명 표기로 옮기는 과정에서 나타난 일종의 착오이다. ‘잣뫼’에서 ‘잣’은 ‘성(城)’이라는 한자에 해당하는 순우리말이다. 성이라는 한자가 우리말을 완전히 잠식하기 이전에 우리 조상들은 성을 ‘잣, 자, 재’라 했다. 그런데 ‘잣뫼’는 발음하면 [잔뫼]가 된다. 자음동화(비음화)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바로 이처럼 [잔뫼]로 발음이 되기 때문에, 후대에 ‘잣’이 성(城)을 의미하는지 잘 모르게 된 상황에서 [잔뫼]라는 소리에만 주목해서 ‘잔 배(杯)’ 자를 쓰게 된 것이다. 굳이 한자자식 표기로 제대로 옮긴다면 ‘성산(城山)’으로 했어야 한다.
배산이 ‘백산(柏山)’, ‘척산(尺山)’ 등으로 쓰였음이 이를 입증한다. 모두 성을 뜻하는 ‘잣, 자’를 ‘잣(나무)’이나 ‘자(길이를 재는 도구)’라는 뜻을 취해 한자로 옮긴 것이다. 이런 이름을 가진 곳은 대부분 성이 있는 곳이다. ‘잣골’ 역시 전국 여러 지역에서 척동(尺洞), 백리(柏里) 등의 한자 지명으로 옮겨 쓰고 있는데 그 마을마다 어김없이 산성이나 토성이 있다. 이는 지명을 연구해온 학자들의 연구에서뿐 아니라, 필자 역시 1987년에 문화재지표조사 연구위원으로 참여하여 남원지역에서도 직접 확인한 바 있다.
‘옥성산(沃城山)’이라는 이름 또한 익산의 옛 지명 옥야현의 성산(城山)이라는 뜻일 테니 근거는 더욱 뚜렷하다. 실제로 토성이 있었다 한다. 현(縣)의 치소(治所) 가까운 곳에 있는 평지돌출형 산이라 군사전략적 요충지이므로 방어를 위하여 성을 쌓았을 것이다.
익산에 온 뒤로, 배산 이름의 유래와 관련하여 온갖 그럴듯한 설명을 수없이 들었지만, 쉬 공감하기 어려웠다. ‘아주 옛날에는 이곳까지 배가 닿았다.’, ‘배 모양으로 생겨서...’, ‘풍수적으로 행주형(行舟形)이라서...’, ‘술잔을 엎어놓은 꼴이어서...’ 등 모두 나중에 배산으로 불리게 된 뒤 갖다 붙인 ‘배(舟)’나 ‘잔(杯)’과 관련된 억지스러운 것들이었다.
그러던 중 전래지명 연구의 권위자이며 문헌학자인 故 유재영 원광대 명예교수의 글에서 충분한 학술적 근거를 발견하고 반가웠다. 필자의 추정과도 일치했다. 물론 근거가 빈약한 앞서의 설명들도 배산과 관련한 이야기를 풍성하게 만들어준다는 측면에서 나쁠 것은 없다.
하지만 ‘잣뫼’처럼 역사?문화적 근거가 뚜렷하고 우리 고장의 옛 삶을 오롯이 담고 있는 좋은 이름이 있으니 이를 널리 쓰면 좋겠다. 범시민운동으로 확산되기를 기대한다. 아울러 ‘잣뫼’ 토성의 옛 흔적을 찾아 복원하는 방안도 추진해보면 더 좋겠다.
아직도 익산시청 홈페이지에는 무슨 근거를 끌어온 것인지 산의 유래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배산’은 ‘바위산’이라는 말로 온통 바위로 이루어진 산이다. 옛말에 바위를 주로 ‘바회’라고 했지만 전라·충청·함경도에서는 ‘바이’라고도 했는데 ‘바이’가 줄은 말이 ‘배’다.(예: ... 여우배=여우바위, 갓배=갓바위, 부엉배=부엉바위, ...) ...” 여기에도 유재영 선생의 견해를 소개해 놓기는 했으나 결론은 이렇듯 엉뚱하게 내리고 있다. 바로잡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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