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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이분남 수필가 | | ⓒ 익산신문 | 야물야물 햇살이 창문 틈으로 끼어드는 게 싫어 아예 문밖으로 나갔다. 체감할 수 있는 온갖 것들이 수위를 산뜻한 수준 이상으로 높인 덕에 보드라니 달려드는 빛의 애무가 절정처럼 달뜬다. 한 발짝 폴짝 뛰기만 해도 손에 잡힐 듯 옥빛 하늘에 걸터앉은 구름 무리가 평화의 강론을 하는 듯 모양을 요렇게 조렇게 잡아 보이며 삶에 짓무른 내 마음을 다독인다. 혹여 어떤 구름 모양을 보며 희망을 생각할 때면 그 사이를 보이지 않는 흐름이 셈여림을 조절하며 차지하곤 하는데 그것은 계절의 위로였을 것이다. 사는 일도 매번 다투어 나아가는 것이 아닌 일상의 간격과 높낮이와 힘을 조절하며 살아야 한다는 의미로 느껴온다. 이래저래 내가 가을의 문턱을 넘을 수 있었던 이유도 결국 시절의 이끎이 아니고 무엇이랴.
먼눈을 거두어 발밑에 떨구었다. 마디마디 근육을 부풀렸던 바랭이의 관절이 초록을 잃고 공허한지 아무렇게나 주저앉았다. 박토를 나무라지 않던 아금박스런 생명력은 어디에다 감춘 것일까. 뿌리의 저 끝 지하의 어느 성일까. 아니면 흙의 아주 작은 포자 귀퉁이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갈바람의 앞섶 어디쯤일까. 하찮게 여겼던 잡초의 용의주도한 깜찍한 처신을 나무라다 그것이 곧 섭리라는 생각에 마음이 닿자 나는 곧 작아졌다. 나는 내게 이어진 인연의 끈이 아주 작게 흔들려도 얼마나 놀랐던가. 가슴이 벌렁대고 불안증이 생겨 당장에 일어나지도 않을 사태를 상상하며 곤혹해 하지 않았던가. 마음의 평정을 되찾을 때까지도 나는 흔들리는 끈을 놓지 않으려고 무조건 당기다가 나뒹굴어 지며 상처를 입지 않았던가. 끈을 과감히 놓으면 다시 팽팽해진다는 사소한 진리를 시간이 훌쩍 지난 다음에야 터득하고는 무지함에 부끄러워하지 않았던가.
주저앉은 바랭이를 손끝으로 잡고 일으켜 보았다. 접혔던 관절이 겨우 굴신하더니 삭신을 오그린다. 복잡했던 하절의 욕심이 우수수 흙 위에 떨어진다. 바랭이 스스로 자신을 해체함은 시듦과 죽음의 껍질 안에 폭죽을 터뜨릴 만한 기쁨의 씨앗이 예비 되어 있다고 확신한 믿음, 그것 아닐까. 그래서 아예 집착과 미련은 그들의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단어만 같다. 바랭이의 겸손을 보며 나의 일생을 되돌아 수많은 가을을 돌다리 건너듯 했지만 한 번도 낙오된 적이 없었던 이유를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그렇다고 시절에 앞서 자신을 내세운 적도 없는 것을 보면 나를 놓지 않으려 안간힘을 다한 자연의 초월적 사랑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계절의 선지자적 초월 앞에선 늘 면구스럽다.
시절의 문턱을 넘으며 농숙한 가을 같은 삶을 우려내 나도 저리 곱게 물들고 싶다. 찐득한 미련일랑 어둑살 지는 노을에 얹어 서녘으로 먼저 띄워 보내고는 휘적휘적 그렇게······.(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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