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 이택회 익산교원향토문화연구회장, 가람기념사업회부회장, 전북불교문학회장 | | ⓒ 익산신문 | 민선 제7대 박경철 익산시장이 취임하고 4년간 익산시정을 이끌 지표를 ‘이천년 역사 고도 녹색 도시 익산’으로 내걸었다. 시청을 비롯한 관공서는 물론 시내버스에까지 이 구호가 걸렸다.
익산이 유구한 역사를 지닌 도시라는 것은 웬만한 시민이면 다 알고 있다. 하지만 ‘이천년 역사’라는 말엔 공감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고도(古都)’라는 용어를 쓰는 데도 동조하지 않는 이가 있다. 그것은 관점이 다르거나 익산의 역사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연 익산에 이천년 고도라는 말을 붙일 수 있을까?
익산은 중국과 우리나라의 역사서에 준왕(準王)이 고조선에서 바다를 건너 내려와 한(韓)의 왕이 되었다는 기록이 있고, 이후 마한, 백제, 보덕국의 중심지로서 유구한 역사와 문화를 간직한 곳이다.
중국 측 기록인 ‘삼국지 위지 한전’에는 준왕이 신하와 궁인(宮人)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한의 지역에 살면서 스스로 한왕(韓王)이라고 일컬었다는 기록이 있고, ‘후한서’에도 조선왕 준이 자신의 무리 수천 명을 거느리고 바다로 도망하여 마한을 공격하여 쳐부수고 스스로 한왕이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우리나라 기록인 ‘삼국유사’에는 ‘위지’의 기록을 인용하여 조선 준왕이 궁인과 신하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남쪽으로 한의 땅에 이르러 나라를 세우고 마한이라 불렀다고 하였고, ‘고려사’와 ‘삼국사절요’에도 준왕이 금마군에 이르러 살았다고 기록하였다.
우리나라 대표적인 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 금마편에는, 후조선왕 기준은 기자의 41대 손으로 위만의 난리를 피하여 바다를 건너서 남쪽으로 한의 땅에 이르러 나라를 세우고 이어 마한이라고 불렀다는 기록이 있다.
이러한 기록에 근거하여 익산시 금마면에 준왕이 살았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다만 문제는 이를 근거로 금마가 고도였느냐는 문제이다. 글쓴이는 비록 유적으로 이를 실증하는 데는 부족할지라도 왕이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과 더불어 수천의 무리가 이주해 살았다면, 비록 그 규모나 시설이 부족할지라도 수도로 볼 수 있다고 판단한다. 설령 이를 학문적으로는 문제 삼을 수 있을지라도 이천년의 역사를 지닌 옛 고을이라고는 할 수 있겠다. 글쓴이는 그 시기를 기원전 194년 무렵으로 추정하기에 2200여 년의 역사를 지닌 고도라고 보고 관련한 글을 쓴 적이 있다.
백번 양보하더라도 익산은 우리 역사에 고조선과 관련한 기록이 전하는 남한의 유일한 곳으로 이를 부각할 필요성이 있다. 이는 익산의 자긍심이기도 하다.
여기다가 ‘조선왕조실록 고종실록’에서는 고종 황제가 1897년 10월에 ‘대한제국’의 황제로 등극할 때, 단군과 기자 이후로 분리된 강토를 고려에 이르러 삼한(마한, 진한, 변한)을 통합하였고, 주변의 여러 나라에서 우리나라를 조선이라 부르지 않고 한(韓)이라 불었으니, ‘대한(大韓)’이라는 국호를 쓴다고 해서 안 될 것은 없다고 하였다. 이로 볼 때 익산은 오늘날 ‘대한민국’이라는 국호의 첫발상지로서 한문화(韓文化)의 원류라고 부를 수 있는 곳이다.
따라서 익산 시민들은 이천년 역사를 지닌 고도의 시민, 대한민국 국호의 발상지에 살고 있다는 자긍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이택회 익산교원향토문화연구회장, 가람기념사업회부회장, 전북불교문학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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