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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한 달 동안 겪었던 고문의 흔적이 70년이 지난 지금도 고스란히 몸에 남아 있다.” 독립유공자 이석규옹(89). 구순을 앞둔 애국지사의 눈은 빛났다. 그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활동하다 일경에 붙잡혀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물고문, 채찍질에 불에 달군 쇠젓가락으로 왼쪽 종아리를 지져댔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치가 떨린다고 한다. 익산 덕기동에 살고 있는 이 옹은 관내 유일하게 생존한 애국지사이다. 허리가 꼿꼿하고 목소리도 맑았다. 광복절을 하루 앞둔 14일 그를 자택에서 만났다. 대담=하대성 편집국장
|  | | | ⓒ 익산신문 | | -요즘 건강은 어떠세요. ▲ 내년이 아흔인데 좋은 편이다. 아침, 저녁으로 동네에서 걷는 운동을 한다. 지인들을 가끔씩 만나 지난 이야기를 나누며 지내고 있다. 막걸리도 한잔씩 하곤 한다.
-2층으로 집이 큰데, 대가족이었습니까. ▲ 놀라지 말라. 아들, 딸 9남매를 뒀다. 자식들이 전국에 살고 있다. 전주, 익산, 광주, 수도권, 부산 등지에서 손주까지 합하면 모두 28명이다. 명절 때 모이면 집안이 난리속이다. 지금은 손주들이 많이 커서 그렇지는 않다. 지금 같으면 다둥이 가족으로 언론에 많이 나왔을 것이다. 상도 받았을 것이다. 그땐 가족이 6~8명은 보통이였다.
-올해 광복절에는 어디 가시나요. ▲ 여기 저기 광복절 행사에서 많은 초청을 받았다. 안행부장관 명의로 서울행사에 참석해 달라고 초대장이 왔다. 전북도에서도 참석해 달라고 하고, 익산시에서도 연락이 왔다.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겠다. 몇 년 전 전북도에서는 모시옷과 두루마기까지 보내주고 초청해 주고 있다. 고마워서 올해도 전북도 행사에 다녀올 작정이다. 엊그제 대통령이 시계선물을 보냈다. 그 전에는 찻잔, 식기를 받기도 했다.
-뒤늦게 2010년에 독립유공자로 선정돼셨는 데, 많이 기쁘셨겠어요 ▲ 어느 날 신문을 보니까 동지가 별세했는데, 그 분이 독립유공자로 나왔더라. 함께 항일운동 하던 친구가 독립유공자면 나도 유공자가 될 것 같았다. 그래서 공적자료를 모아 보훈청에 보냈더니 유공자로 선정됐다. 광복과 6.25전쟁을 거치며 교직생활을 했다. 아내와 9남매와 함께 정신없이 살아왔는데 뜻밖에 유공자로 선정돼 큰 영광이다. 손주들에게 자랑스러운 할아버지로 남게 돼 무척 기뻤다.
-당시 목욕탕에서 폭행당하고 그 다음은 어떻게……. ▲ 그 이후 무작정 시비를 거는 일본인 학생을 두들겨 팼다. 그것이 화근이 돼 무기정학을 당했다. 이때 학우들이 나의 항일저항 정신을 인정해 ‘무등독서회’ 가입을 허락하게 됐던 것이다. 이후 모임을 통해 ‘우리 역사 바로 알기’ 토론회를 매월 1차례 이상 갖고 일본의 군사훈련과 징병소집에 대한 반대 투쟁, 일본 패망설을 주 내용으로 한 전단지 배포 등 항일운동을 벌였다.
-옥고도 치르셨지요. ▲ ‘무등독서회’ 회원들은 1년여 동안 활발한 활동을 했다. 그렇다가 1944년 일본경찰에게 적발돼 광주경찰서로 끌려가 갖은 고문을 받았다. 난로에 불을 달군 쇠젖가락으로 장딴지를 지지고 채찍 고문 등 힘겨운 고문을 당했다. 이듬해인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으면서 출옥했다.
- 지금 젊은이들에게 하고픈 말씀은 ▲ 그 당시 시대적 과제는 독립이었다. 빼앗긴 나라와 주권을 되찾는 게 지상 최대 목표였다. 지금은 어떠한가. 남북 분단 극복이 시대적 과제가 아닌가. 나라와 민족의 평화와 통일을 위해 국민들이 뜻과 마음을 모아야 한다. 제2의 독립운동을 통일로 이뤄야 한다. 나도 눈을 감는 그 순간까지도 통일조국을 위해 힘을 보태고 기도하겠다. /정리=이솔잎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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