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 김정훈 원광대학교 가정아동복지학과 교수 | | ⓒ 익산신문 | ‘고3 엄마하기 어때?’ 하고 친구에게 전화했더니 ‘별로 해줄 것이 없어. 그냥 옆에만 있어’ 한다. 아이가 크니 엄마가 딱히 해줄 수 있는 것도, 말해 줄 수 있는 것도 없다. 엄마가 해 줄 수 있는 건 힘드냐고 걱정해주고, 밥 차려주는 것이 거의 전부다. 하지만 밥을 차려 줄 기회도 많지 않다. 하루 3끼 학교에서 먹고, 주말에는 자거나 친구를 만나러 가서 미리 봐둔 찬거리는 냉장고에 그냥 남는 일이 다반사다.
도대체 내가 아이에게 해 줄 것이 뭘까?
아침 신문에 ‘바둑을 잘 두는 아이가 공부를 잘 한다’하는 인터뷰기사가 나왔다. ‘운동 잘하는 아이가 공부를 잘 한다’ ‘아빠와 저녁식사를 하는 아이가 공부를 잘 한다’ ‘잘 자는 아이’ ‘잘 노는 아이’ 결국 아이에게 무엇을 배울 기회를 주고, 쉴 수 있게 하고, 이야기를 나눠도 공부를 잘 하게 하기 위해서라는 말이다. 우리는 이리도 ‘공부 잘 하는’이라는 말에 집착하고 있는데, 사실 ‘공부 잘 하는’이라는 말의 뜻을 정의하고 있지도 못하다. ‘공부 잘 하는’이란 말은 ‘시험 점수가 좋은’ 이란 뜻으로만 인식한다. ‘엄마, 나는 공부를 잘 할 자신은 있어. 그런데 점수나 등수를 잘 받으라고 하면 그건 자신이 없는데...’ 아이는 우리보다 훨씬 더 많은 의미의 ‘공부 잘 한다’를 생각하고 실천하려 하는 것 같다.
공부를 잘 하는 것에 우리가 집착하는 것은 그것이 우리가 아는 내일의 성공에 이르는 가장 보편적인 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인 것 같다. 우리 엄마들 시대에는 그것이 보편적인 길이었을지 모른다. 그런데 이제 우리는 ‘시험 점수라는 공부’가 성공에 이르는 유일하지도 보편적이지도 않은 하나의 길일 뿐이라는 많은 예들을 본다. 다양성 때문이다. 성공의 다양성, 인간 특성의 다양성, 생각의 다양성. 기회의 다양성. 경험의 다양성, 사회구조의 다양성 등등. ‘진화는 진보가 아니라 다양성의 증가’라는 고생물학자 스티븐 제이 굴드의 주장을 빗대자면 우리 사회는 진화되어왔고, 진화되고 있다.
다양성의 증가는 타인들과의 관계 증가를 가져온다. 그러면 나는 아이와 타인들과 관계하는 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세상에는 어떤 타인들이 있는지, 그들의 생각은 어떤지, 우리는 그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그런데 지금껏 우리는 그 타인들과 경쟁하라고, 그리고 이기라고 이야기 했다. 그래야 행복할 거라고. 그런데 한신대 명예교수이신 김경재 목사님은 진정한 진보적 참교육은 차별없는 교육, 재능개발 육성과 더불어 측은지심을 비롯한 인의예지 단초를 살려내서 육성하는 교육이 라고 하신다.
측은지심이란 하늘과 같은 심성으로 함께 슬퍼하는 큰 마음인 자비처럼 어려움에 처한 생명을 볼 때 이심전심 자발적으로 공감하고 반응하는 능력이라고 한다. 탐욕, 무책임, 이기심의 총중량이 지나쳐 복원력을 상실한 세월호에서 선박 밑창에 평형수 보충이 필수적이었듯이 측은지심의 복원은 착함과 어짊이라는 귀중한 사람성품이 피어나도록 하는 인간교육 밑바탕에 평형수 보충과 같은 일이라는 것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얼마 후에 큰조카가 태어났다. 동생은 인지라고 이름을 지었다. 아버지가 ‘선(善)한 아이가 태어나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똑똑하고, 능력있고, 당당한 모습을 좋아하셨다. 그런데 그 분이 가장 자손에게 바라신 것은 ‘선(善)한 사람, 선(善)한 모습’이라는 걸 그때 알았다.
이미 내 아이에게 사회는 이기심과 욕망과 무한경쟁을 강요하고 있으니, 난 다양한 주위사람들의 이야기를 해주고, 이들을 보는 생각과 마음의 힘이 따뜻하게 자라나도록 평형수를 채워주려 한다. 이제 엄마가 아이에게 해 줄 수 있는, 가장 해줘야 하는 것은 귀중한 성품이 피어나도록 옛 사람이 우리에게 주었던 그 ‘선함의 기도’를 드리는 것이다.
김정훈 원광대학교 가정아동복지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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