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병훈 원광대 한의과대학 병리학교실 주임교수
5월 이후 여러 가지 사건이 겹치면서 갑을논쟁이 뜨거웠다. 포스코 라면상무 건, 윤창중 성추행 사건, 호텔 빵회장 지갑 폭행 건, 남양유업 사태 등이 겹치면서 논란이 증폭되었던 것이다.
사회적으로 억눌린 상태를 경험한 사람들의 피해의식이 인터넷과 소셜미디어를 통해 폭발하면서 커다란 사회문제로 제기된 것이다. 우리 사회가 삭막하고 무섭다는 느낌을 주는 논쟁이다.
조직과 사람 사이의 다양한 관계가 ‘상식과 순리’에 의하지 않고 돈과 학벌 및 인맥에 기반 해 설정되고 소유한 권력의 대소유무에 따른 수직적 계층구조가 심화되고 있는 것이 최근 우리 사회의 특성이 되어버린 것 같다.
그 원인이 무엇일까? 생각해본다. 우리나라가 선진국이 되지 못해서 일까? 라는 기본적인 물음에서부터 천민자본주의라 불리며 패자에 대한 배려가 없는 승자 독식의 사회구조가 그렇게 만든 것일까? 자본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무한경쟁의 자유주의 글로벌 트랜드 때문인가? 인터넷과 SNS 등의 소셜미디어 발달 덕분에 작은 일이 과도하게 증폭되어 나타난 현상일까? 아니면 좀 더 근본적으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인문학적 성찰이 부족한 시대가 그 근원일까? 라는 의문에 이르기 까지 여러 가지 생각이 든다. 아마도 다양한 요소가 겹쳐서 나타나는 사회 현상일 것이다.
사회적 관계가 형성되면 갑을이 없을 수는 없다. 인간사회의 관계는 수평이나 수직이든 어떤 형태로든 다양한 관계가 형성되게 마련인 것이다. ‘영원한 갑“과 ’언제나 을‘인 관계는 없다. 특히 개인적 관점에서 보면 갑을의 관계는 언제든지 바뀔 수 있는 것이다. 무소불위의 갑질을 해대는 ‘슈퍼갑‘도 을이 될 수 있다. 절대로 을일 수만은 없는 ‘나쁜 을‘ 도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그 정도가 ’노예관계‘ 라 할 만큼 극단적으로 갑을관계가 나타난다.
조직이든 개인이든 영원한 갑을관계는 없다고 봐야한다. 언제든지 바뀔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사회가 피해의식 없이 갑과 을이 서로를 인정하며 자기 스스로 행복감을 느끼는 사회가 될 수는 없을까? 더 근본적으로 인간을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런 것을 고민하는 것이 인문학일 것이다.
갑을논쟁의 한 켠에서는 최근 인문학열풍이 뜨겁다. 고전이라 불리는 문학, 역사, 철학 분야에서부터 인간과 사회를 화두로 하는 내용에 대하여 새로운 조명이 활발하다. 인문학을 주제로 한 각종 강연과 프로그램이 온 오프라인에서 넘쳐난다. 기업과 대학에서도 인문학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왜 그럴까? 또 의문이 든다.
인간본성을 회복하고 존재에 대한 믿음을 확인하기 위한 도구로서 인문학이 관심의 대상이 되는 당연하다. 그러나 최근의 한국사회에 부는 인문학 열풍은 본질을 비켜나가는 듯하다. 실용과 이익에 근간을 두는 기업자본주에 매몰되는 듯하다. 인간과 그 관계에 대한 성찰을 근본으로 하는 인문학조차도 그 취업을 위한 도구로 활용되고, 사회적 지위를 치장하기 위하여 교양을 갖기 위한 장식품으로 변질된다.
기업의 이미지를 개선하고 개인의 교양을 뽐내기 위해서 플라톤과 소크라테스, 니체와 바그너, 다빈치와 다윈 등 화려하게 인류의 지성사를 이끌어 온 위대한 선인들의 차명이 필요한 시대가 된 모양이다. 그것도 나쁘지만은 않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인문학적 교양이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인류의 미래와 인간사회의 지속적고 균형적인 발전 및 자연과의 공생을 위해서 펼쳐져야 하는 분야이다. 개인적인 도구나 새로운 기업가치를 창출하기 위한 도구로서 만 전락되어서는 또 다른 비이성적 갑을관계를 생산할 뿐이다.
21세기 새로운 인간관계상을 ‘호모심비우스(공생인)’로 정의한 어느 생물학자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인간은 같이 살아야만 행복을 느낄 수밖에 없는 존재이며, 우리는 그 관계의 테두리 안에서 가치를 인정받을 수 존재라는 것을 이해해야 할 때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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