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근혜 후보 심중 가장 잘 전달
대통령 선거가 10여 일도 남지 않은 가운데 여야 정당 측의 '입심 대결'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정당 대선 후보들의 최전방을 사수하는 ‘촌철살인의 전사들’ 중 유독 눈에 익숙한 대변인이 눈에 띈다.
바로 익산 여산면 출신인 새누리당 중앙선대위 박선규 대변인(51)이다. 그동안 TV에서 자주 보던 얼굴이라 전혀 낯설지 않고 친근하게만 느껴진다.
박 대변인은 20여 년 동안 KBS 뉴스 앵커, 특파원, 종군기자로 맹활약한 언론인 출신이다.
그런 그가 청와대와 정부 대변인(문화체육관광부 제2차관)에 이어 새누리당 중앙선대위 대변인에 임명돼 ‘박근혜 후보’ 입으로 불꽃 튀는 대선전 최선봉에 나서고 있다.
방송 기자 출신답게 준수한 외모에 정확한 발음, 간결하면서도 톡톡 튀는 언어로 인기를 한 몸에 받고 있다.
정치권에선 박 대변인을 박근혜 후보의 메시지를 유권자에게 가장 잘 전달하는 대변인으로 꼽을 정도다. 당내에선 박근혜 후보의 심중을 누구보다 잘 전달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박근혜 후보는 대변인 후보로 추천된 5~6명의 다른 후보들을 모두 제치고 박 대변인을 발탁한 것으로 알려졌다.
박근혜 후보가 박선규 대변인을 발탁했을 때 언론은 ‘의외의 발탁’이라며 놀라움을 표시했다. 왜냐하면 박 후보와 관계가 소원한 것으로 알려진 ‘이명박 대통령의 입’으로 자타가 공인하는 이명박 정부의 핵심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박 후보는 이대통령에게도 직언을 서슴지 않았던 박 대변인의 강직한 성품과 대변인으로서의 능력을 높게 샀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그런 박선규의 발탁에 대해 지금은 캠프내외에서 ‘최고의 선택’이었다는 평가가 내려진 상태다.
박 대변인은 새누리당에서 중요한 순간마다 내보내는 대표 대변인이다. 기록을 근거로, 탄탄한 논리를 바탕으로 한 박 대변인의 논평과 브리핑은 기자들로부터 최고의 평가를 받고 있다. 물론 상대후보 진영 입장에서는 가장 껄끄러운 상대, 경계대상 1호로 인식되고 있다. KBS 정치부·사회부 등을 거친 박 대변인은 이명박 정부 초기인 지난 2008년 6월 언론2비서관으로 청와대에 들어가 이듬해 9월에 청와대 제1대변인, 2010년 7월에는 정부 대변인을 겸임하는 문광부 2차관에 발탁됐다. 청와대·정부·당의 '입'을 모두 지낸 첫 정치인인 셈이다.
박 대변인은 지난 4·11 총선에서 서울 영등포갑 지역구에 전략 공천을 받고 출마했지만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박 대변인은 선대위 대변인에 발탁된 뒤 "통합과 화합의 정치를 위한 박근혜 후보의 진실성을 느꼈다"고 들고 "이번 대선은 후보의 이미지가 아니라 누가 더 국정을 잘 운영할 수 있는지가 선택의 기준이 돼야 하며, 새누리당을 여러 차례 위기에서 구하며 위기관리 능력을 보여준 박 후보가 적임자"라고 했다.
31살에 홀로되신 어머니를 따라 고향을 떠나야했던 박 대변인은 "그동안 고향에 대해 별로 관심을 가지지 못했는데 관심과 사랑을 베풀어주셔 몸 둘 바를 모르겠다"며 "앞으로 고향의 이름에 부끄럽지 않게, 주신 사랑에 어긋나지 않도록 고향발전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전쟁터에 다섯 번이나 종군 취재
박 대변인은 서울 양천 갑 국회의원에 도전장을 내밀 당시 '자신을 한마디로 표현해 달라'는 기자들의 요청에 "기자로 재직하면서 걸프전, 소말리아 내전 등 종군취재만 다섯 번 다녀온 사람"이라며 "일단 해야 할 일이라고 판단되면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몸을 던지는 사람"이라고 답변했다.
1987년 KBS기자로 입사한 박 대변인은 기자 생활 중 가장 고마운 것은 아무런 사고 없이 5차례의 종군취재를 마친 것이라고 말한다.
박 대변인은 소말리아 내전 등 다섯 곳의 전쟁터를 경험했다. 아마 당시 현역기자 중 가장 종군 경험이 많지 않을까 싶다.
첫 번째 종군 경험은 1991년 1차 걸프전이었다. 처음으로 비행기를 타고 나간 해외구경이 전쟁터였던 셈이다.
만 3년이 조금 지난 신참기자였던 박 대변인은 그곳에서 기자로서 눈을 떴다고 한다.
그 후 박 대변인은 소말리아 내전과 수단 내전 현장에서 독재보다 훨씬 위험한 무정부를 경험했다.
박 대변인은 “누구도 나를 지켜줄 수 없는 곳, 지켜준다고 약속도 할 수 없는 곳, 모든 것을 감과 눈치로 해결해야 했던 곳. 그곳은 제가 경험한 지옥이었다”고 회고했다.
그 후 박 대변인은 이념이 무너진 유고(1993년)에서 민족주의를 앞세운 소름끼치는 과거를 목격하기도 했다.
#탈북자들의 존재 세상에 가장 처음 알려
박 대변인은 종군 취재를 다녀온 후 1994년 탈북자들의 존재를 세상에 가장 처음 드러내는 기쁨과 보람도 경험했다.
기자로서는 세계적인 특종이었지만 기뻐만 할 수 없었다고 박 대변인은 귀띔한다. 탈북자들의 처지가 너무 가슴 아팠기 때문.
박 대변인은 “중국 땅에서 탈북자들은 사람이 아니었다. 약간의 먹을 것에 하찮은 돈 몇 푼에 팔려 다니는 짐승 같은 처지였다”면서 “하지만 사람처럼 살지 못하는 탈북자들이 북한 땅에서 보다는 행복하다고 스스럼 없이 말할 때 비통함을 느꼈다”고 말했다.
다시 잡혀 북으로 끌려가느니 죽는 게 낫다며 쥐약을 갖고 다니던 18살 소년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고 했다.
박 대변인은 기자들을 피하던 탈북자들에게 ‘당신들을 도와줄 곳은 대한민국 밖에 없다. 그 대한민국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여론이 필요하다. 내가 그 여론을 만들어 드리겠다’고 여러 날을 찾아다닌 후에야 겨우 취재를 할 수 있었다.
그 인연으로 지금도 박 대변인은 탈북자들과 깊은 인연을 맺고 있다.
#미 하원의원 인턴 보좌관 역임
박 대변인은 2002년 미국의 정치학회에서 주관하는 미국 의회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행운을 얻었다.
1년 동안 의회를 익히고 선진정치를 경험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다.
박 대변인은 에드워드 로이스 의원 사무실에서 탈북자 문제와 한반도 문제를 도왔다.
당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박 대변인의 건의에 따라 에드워드 로이스 의원이 하원에 제출한 ‘탈북자들을 위한 결의안’이 미국 의회에서 처음 통과될 때의 상황.
그날 에드워드 로이스 의원은 제안 설명을 하는 자신의 뒷자리(하원 본회의장)에 박 대변인을 앉게 했고, 그 모습은 그대로 C-SPAN을 통해 미국 전역에 방송됐다. 그리고 결의안에 이어 청문회도 열렸다.
박 대변인은 그제야 아무런 계획도 없이 왜 미국의 의회에까지 가게 됐는지 이유를 알게 됐다고 한다.
#박선규 대변인이 걸어온 길
-전북 익산(61년생)
-고려대 교육학
-고려대 언론대학원
-KBS 기자
-소말리아 내전, 유고 내전 등 종군 5회
-사건 25시, 일요진단 진행
-한국기자협회 부회장
-미국 하원의원 에드워드 로이스 인턴보좌관
-대통령실 언론2비서관
-청와대 대변인
-제37대 문화체육관광부 차관
-평창동계올림픽 유치 실무위원장
-대구세계육상선수권대회 부위원장
-저서
<미국 왜 강한가>
<선생님 당신이 희망입니다>
<희망과 맞팔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