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희 익산의병기념사업회위원장
독립기념관 제4전시실에 들어서면 ‘역사를 잃어버리는 민족은 망한다’ 라고 쓰여 있다. 왜일까?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대화이며 거울이기 때문이다.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고 우리 군대가 해산되는 현실을 바라보던 뜻있는 청년들이 참을 수 없는 울분과 애국심에 들고 일어났다. 오직 쓰러져 가는 조국을 살리겠다는 일념뿐이었다. 1907년 팔봉 석암리 관동부락에 살던 이규홍 청년은 부친 이기영 씨의 후원을 받아 257명의 의병을 조직한다. 2,000여석의 재산을 방매하여 얻은 자금으로 무기를 구입하고 총을 쏠 줄 아는 산포수를 동원하여 의병을 훈련했다. 5개월 동안 전북 완주 가금제와 진안 용담에서 두 차례 전투를 했고 마지막 격전은 충남 금산 남이 백령성 이었다. 일본 정규군 기마부대와 악전고투를 했다. 1908년 1월이었다. 살을 에는 듯한 추위 속에서 전쟁 장비와 보급품은 바닥이 나고 적의 막강한 화력에 희생자는 늘어가고 전의는 상실한 상태였다. 3차에 걸친 전투에서 왜병 129명을 사살했고 의병도 85명이 순국했다. 의병을 해산한 이규홍의병장은 은둔 생활 중 국내 활동에 한계를 깨닫고 1918년 상해 임시정부에 가서 이동령, 이광수, 안창호, 신익희 등을 맞아 독립 청원서를 가지고 파리로 떠나는 김규식 동지에게 1,300원을 지원하고 1920년에는 만주에서 김좌진 장군을 만나 사관원 양성소에 3,000원을 헌납했다. 국내 정세파악과 자금 마련 차 국내에 잠입했다가 왜경에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으로 사경을 헤매다가 가석방으로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와 의탁할 곳이 없어 동생 집에서 고문 후유증으로 1929년 6월6일에 순국했다. 정부는 이규홍의병장과 함께 4명의 의병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익산의병이 역사에 남긴 것은 첫째 의병사에서 5개월간이나 장기전을 한 곳이 없으며. 둘째 익산의병은 순수한 민초들에 의해서 조직된 것이고 셋째 의병은 국내활동으로 끝이 났으나 익산의병장은 해외에까지 가서 독립운동을 도왔다는 것이다. 이러한 자랑스러운 익산의병인데 지금까지 의병사를 연구한 단행본으로 된 책자도 없으며 105년이 되도록 익산의병사를 쓴 학자가 없어 한국독립운동사에 기록되지 못하고 있다. 참으로 통탄스럽고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지방화 시대에 지역의 역사문화가 이렇게 방치될 수 없다. 이것은 순국선열에 대한 도리가 아니다. 지금은 기념사업회가 주도하는 조촐한 기념식과 포럼을 하고 있지만 앞으로 관련단체가 공동으로 추진하는 범시민적인 기념행사를 해야 하는 동시 익산의병사도 쓰고 기념사업도 추진해야 한다.
그리고 익산을 85명의 순국열사가 나신 자랑스러운 충절의 고장인 것을 온 시민의 마음속에 깊이 새겨 익산에 대한 자부심과 긍지를 가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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