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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지역에 선교의 첫발을 내디딘 미국 남장로교 선교부 소속 '7인의 개척선교사'의 모습.
#남참부락 ‘ㅡ’자형 초가 예배당 남전교회 교인들은 1900년 2월 21일 영수 이윤국의 사랑채를 예배처소로 정한 후 거의 3년 동안 예배를 드려왔다. 하지만 교인들 스스로 마련한 예배당을 갖기를 소원했던 바 1901년부터 예배당 건립을 위해 특별 연보(헌금)할 것을 작정하고 열심히 연보했다.
그 결과 3년 후인 1903년에 70여 원을 연보할 수 있었다. 마침 당회장이었던 전위렴 선교사가 신병 치료차 1902년에 미국에 일시 귀국한 상태였기 때문에 남참리 교인들의 순수한 자립의지에 의한 열정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를테면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들의 직접적인 재정 지원과 선교적 관심 속에서 세워진 궁말(구암)교회나 서문밧(전주)교회와 비교한다면 남참문예배당의 건립은 순전히 남참 교인들만의 독자적인 자립의지에 의한 것이기에 초창기부터 민족 교회로서의 전통을 세웠다는 의미에서 그 차별성이 있다고 할 것이다. 전위렴 선교사가 다시 조선으로 돌아온 1903년 초, 그동안의 연보금으로 남참리에 있던 김여원 씨의 다섯 칸 초가집을 매입했다.
그리고 집안의 구조를 바꿔 마루는 물론이고 부엌까지도 방으로 개수함으로써 명실공히 예배당을 건립하니 비로소 ‘남참문교회’라고 불렀다고 한다. 교회 예배당의 구조는 ‘ㅡ’자형으로 된 다섯 칸 초가였다. 교회당 내부는 절반을 나누어 양쪽으로 구분하고 그 양편에 남자와 여자를 구별해 앉게 했다.
그리고 강대상이 놓여 있는 단을 제외하고 예배당의 중앙에 흰색 광목(廣木)으로 막을 드리워 서로 상대편을 볼 수 없도록 함으로써 철저하게 남녀유별의 윤리관을 지켰다. 단 예배당의 정면 중앙에는 강대상이 놓여 있어서 예배를 인도하는 목사만이 남자반과 여자반 양쪽을 바라보며 설교할 수 있도록 구조가 만들어져 있었다고 전해진다.
#영성부락의 ‘ㄱ’자형 초가 예배당
1913년 4월 14일 교회에서 열린 제직회(당회장:부위렴 선교사)에서 예배당을 새로 신축하기로 결정했다.
10여 년 동안 교회가 왕성하게 부흥함으로써 교인수가 200여 명에 달해 기존의 ‘ㅡ’자형 예배당은 너무나 협소했다.
따라서 교회를 신축하기로 결의하고 10년 동안 사용해 온 예배당은 박성윤 씨(본 교회 교인)에게 80원에 매도하고, 예배당을 신축할 터는 영성부락(오산면 신덕리 소재)에 있는 김금석 씨의 전답으로 하기로 하고 전답 1두락(마지기)을 30원에 매수했다.
교회 건축을 위해 교회의 모든 형제자매들이 합심 기도하면서 연보한 결과 700여 원이 모아졌다. 교회 신축을 결의한 지 약 1년 만인 1914년 5월 신덕리 영성부락에 12칸 ‘ㄱ’자형 초가 예배당의 주춧돌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
기존의 ‘ㅡ’자형 예배당의 결점을 보완한 ‘ㄱ’자형 구조의 예배당은 일명 ‘고패집 교회’로 불렸다.
ㄱ자교회와 종탑 앞에서 군입대를 앞둔 박봉주, 김창문, 정용선, 정진영 용사들.(앞줄 네명 왼쪽부터)
#남참문교회와 외국인 선교사들
1904년 전위렴 선교사가 신병 치료를 이유로 전주선교부로 전출되고 하위렴(W.B.Harrison) 선교사가 군산선교부로 전출해 옴으로써 새 담임 선교사를 맞은 남참문교회의 교인들은 더욱더 열성적으로 교회 성장을 위해 노력했다.
마침내 복음 전파 후 10년째인 1907년 가을에 이르러 교회는 공의회를 개최해 장로에 이성일 씨, 서리집사에 김성선 씨, 김창선 씨를 피택하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교회조직이 체계적으로 정립되면서 교세의 성장을 위해 더욱 박차를 가했다.
이듬해 다시 하위렴 선교사가 본국으로 귀국하게 되고, 어아력(A.M.Earle) 선교사가 취임했다. 그러나 1909년이 채 가기도 전에 어아력 선고사가 미국으로 돌아가게 되자, 이어서 부위렴(W.F.Bull) 선교사가 다시 담임 교역자로 활동하게 된다. 남참문교회는 1897년에 전위렴 선교사를 담임 교역자로 맞은 이래 최초로 조선인 목사를 맞이하게 되는 1917년까지 거의 20년 동안 4명의 미국인 선교사가 남참문교회의 담임 교역자로 활동했다.
당시의 남전교회록이나 당회록을 훑어보면 선교사들이 매년 정기적으로 봄과 가을에 예배를 인도하고 세례예식을 가졌다. 남전교회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한 선교사들이 보여주었던 사명의식과 그들의 역할을 가볍게 취급할 수 없다. 이를테면 씨를 뿌린 자들도 그들이요, 그 씨가 건강하게 발아할 수 있도록 토양과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헌신한 자들도 그들 선교사들이었다고 말하기에 주저함이 없을 것이다. 물론 초창기 남전교회의 조선인 영수와 조사들의 수고, 그리고 각 교인들의 영적 성장을 위한 애씀도 빼놓을 수 없다. 무엇보다도 분명한 것은 예수의 제자 된 삶을 살려고 노력했던 남전교회 신앙의 선배들의 경건한 삶의 모습들이 오늘의 남전교회를 지탱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권찬 기자
선교초기 군산항(189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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