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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동의 연혁과 현황
행정동 중앙동은 3개의 법정동(창인동, 중앙동, 갈산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서쪽으로는 송학동과 모현동이 접하고 있고, 북으로는 남중동이 있다. 동으로는 마동이 있고 남으로는 평화동과 인화동이 있다. 과거 오랫동안 독립된 행정동 이었던 3개동이 외곽지역의 개발로 인구가 변방으로 이동하여 인구 공동화현상으로 이제는 3개동이 하나의 행정동으로 묶이는 비운을 맞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중앙동지역은 남일면의 이리에 속했다. 1911년 익산군청이 금마에서 남일면으로 옮겨오면서 남일면은 익산의 중심이 되었고, 1912년에는 호남선이 개통되면서 1914년에 남일면(이리, 마동리, 동산리, 목천리)이 동일면 (신흥리, 금강리, 대장촌리, 석탄리)과 합쳐져서 익산면이 되고, 남이면과 서일면이 합하여 오산면이 통합됐으며 북일면은 그대로 북일면이 되었다. 1911년 당시 이리의 인구는 3,776명이었다고 한다. 중앙동은 이리의 중심가로 중앙에 위치하여 지어붙인 동명이다. 1957년 9월 4일 행정구역 재조정에 의해 중앙동 1가에서 2가, 3가로 되었다가 1974년 7월 4일 중앙동이 되었다. 1998년 2월 2일 창인동과 갈산동을 합쳐 행정 운영동, 중앙동이 되었다. 일제시대에 이곳을 영정(榮町) 이라고 한 것은 가장 번화가이기에 붙인 이름이며 익산면 때의 익산면사무소도 이곳에 있었다. 역 앞길 남쪽에 위치하며 익산의 일백년 역사에 가장 번화가였던 중앙로(일명 영정통)가 있는 곳이었다. 1990년대부터 영등동지역이 개발되면서 그 명예를 영등동에 넘겨주고 말았다. 법정동인 창인동과 갈산동이 있는데 그중 창인동은 1957년 9월 14일 행정구역 조정에 의해 북창동과 철인동을 합하여 창인동 1가, 창인동 2가로 변경 했다가 1974년 7월 1일 행정구역 재조정에 의해 창인동이 되었다. 창인동이란 이름은 북창동과 철인동에서 한자씩 취한 것이다. 철인동 일부는 1977년 이리역 폭발사고 때 크게 파괴되어 그 후 재건됐다. 1998년 2월 2일 창인동은 중앙동, 갈산동과 함께 통합되어 중앙동으로 개칭되어 법정동으로 남아있게 됐다. 창인동 2가는 남북로 좌편으로 거의가 익산역이며, 창인동 1가는 역 앞길 북쪽으로 중앙시장을 끼고 있는 익산의 핵심 번화가 지역이다. 갈산동 지역은 철도부설과 1912년 호남선 개통이전에는 황량한 야산으로 칡과 나무들이 자라고 있었다고 한다. 1911년 익산군청이 남일면으로 옮겨온 후에 일본인들의 주거지로 되어 지금도 일본식 건물 여러 채가 남아있다. 익산면 8개 리중 하나인 이리에는 14개 마을이 있었는데 갈산리는 그 중에 하나였다. 1998년 2월 2일 중앙동, 창인동과 함께 통합되어 행정 운영동 중앙동으로 개칭되어 법정동으로만 남게 되었다. 중앙동의 현황과 모습 행정동 중앙동의 행정 구역은 20개통 83개 반으로 구성되어 있고 면적은 0.88㎢로서 2009년 2월 현재 총 가구수 2,494가구에 총 5,348명의 인구로 인근 오산면을 웃도는 정도의 인구다. 법정동인 중앙동과 창인동은 익산역의 소재로 인해 교통의 중심지며, 익산의 일백년 역사에서 가장 오랫동안 익산상업의 중심지로서 중앙시장 등 상가가 밀집되어 있다. 현재는 몹시 쇠락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서쪽으로는 송학동과 모현동이 접하고 있고, 북으로는 남중동이 있다. 동으로는 마동이 있고 남으로는 평화동과 인화동이 있다. 어느 도시나 마찬가지로 그 도시의 가장 중심지역에 중앙동이라는 명칭이 붙여져 있다. 그러나 산업화가 이루어지면서 도시의 인구가 늘어나고, 시 외곽 지역에 신도시가 개발되면서 아파트가 들어서며 인구와 상권이 중심지에서 개발지역으로 이전함에 따라 중앙동은 상업이 쇠퇴하고 인구공동화 현상이 발생하게 됐다. 익산도 예외는 아니어서 신동과 모현동과 영등동이 개발되면서 인구가 빠져나가고, 익산의 가장 번화가요 상업의 중심지이던 창인동과 중앙동은 이제 그 위상을 유지하지 못하고 쇠락을 길을 걷고 있다. 창인동과 중앙동이 갈리는 역 앞 길은 1977년 익산역 열차 폭발사건이 터지기 전만 해도 익산의 최고 번화가며 그야말로 중심 중의 중심도로였다. 호남선과 전라선, 군산선이 갈라지는 철도의 중심지역인 이리역은 전국에서 손가락에 꼽히는 큰 역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이리역을 빠져나오는 통학생들의 물결이 시작하여 하루 내내 이리역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1960년대 초에 ‘낮에는 10만, 밤에는 6만’ 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북적거렸다. 이리역 앞에는 버스정류장이 있었 실로 하루 수만 명의 인파가 기차나 버스를 이용하여 이리로 들어오고 모두들 이리역 앞을 지나 시내로 나갔다. 역 앞길보다 더 유명한 또 하나의 길이 바로 영정통이다. 일반적으로 평화동에 있던 이리극장에서부터 제일은행까지를 말한다. 해방이 될 때까지도 역 앞길의 북쪽으로는 민가가 있었을 뿐 상가는 제대로 형성되지 못했다고 한다. 이리극장과 삼남극장이 있어 하루 종일 인파가 북적인 거리였다. 실로 해방이후 통학생들과 시내 중심권에 사는 학생들은 거의 모두가 이리극장과 삼남극장과 시공관으로 이어지는 제일은행 사거리를 중심으로 살다시피 했다. 역 앞길과 역사가 옮겨지면서 새로 뚫린 4차선 중앙로의 좌우 상가를 제외하고는 빈 상가가 많고, 공터가 눈에 띄며 부동산 거래도 잘 이루어지지 못하는 형편이라고 한다. 다행히 역 앞길과 열차 폭발사건 이후 새로 난 중앙로에는 아직도 제일은행, 중소기업은행, 전북은행, 우리은행, 국민은행, 신한은행이 있다. 우체국길에는 농협익산지점과 거의 유일한 관공서로 우체국이 건재하고 있지만 이마져도 모현동 신시가지로 옮겨갈 예정이다. 중앙동의 전통마을 호남동은 익산역에서 앞쪽에 있던 마을로 지금 익산역 광장 앞의 중심지를 말한다. 호남선 철길을 따라 형성되었기 때문에 붙여진 마을이름이다. 후일 중앙동 1가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신흥동은 호남동 남쪽의 마을로 도시가 형성되면서 새로 생긴 마을이라는 뜻으로 신흥리라고 하였다. 현재 구 삼광교회와 제일건설 빌딩을 중심으로 한 일대를 말한다. 후일 명칭이 중앙동 2가로 변경되었다. 상신동은 현재 중앙동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마을로 이 곳 역시 도시가 형성되면서 새로이 생긴 동네를 말한다. 신흥리의 위쪽에 형성된 마을이기 때문에 이와 구분하기 위하여 상신동이라 했다. 후일 중앙동 3가로 개칭되었다. 고란다방에서 직행하여 역전의 정류소로 뚫린 골모에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의 농협1길을 말한다. 말광정은 일제시대에 김외과 병원에서 서쪽 편 영정통으로 가는 길을 말광정이라 했다. 지금의 농협2길을 말한다. 수정은 일제시대에 중앙국민학교에서 이리극장 쪽으로 가는 골목을 부른 이름이다. 지금의 우체국 1길을 말한다. 유정은 지금은 동서관통로(중앙로)가 된 이전의 골목길을 부른 이름이다. 중앙동의 문화유적과 유물 우리나라 철도는 개화기였던 1899년 9월 18일 노량진과 제물포(현 인천)간 단선철길 33.8㎞를 부설하고 증기기관차기 객차 6량을 매달고 운전을 시작한 것이 철도사의 개시였다. 국철이 1911년 3월에 착공하여 1912년 3월 6일에 이리와 강경간의 호남선과 군산선이 개통됨에 따라 이리역 이리 보안구 이리관구가 개설되고 같은 해 2년 10월 1일에는 이리에서 김제까지, 1914년 1월 11일에는 목포까지, 그리고 전라선은 사철인 전북철도주식회사가 공사를 맡아 1914년 5월에 착공하여 그해 11월 17일에는 전주까지 철도가 개통되어 익산역이 문을 열게 되었다. 호남선은 1910년부터 철도 부설권을 독점하여 본선공사를 5개년 계획으로 완성할 방침으로 1910년 1월에 대전-연산간의 24.8리의 공사구간을 비롯하여 8개공사 구간을 설정하였다. 1914년 1월 11일 전북 정읍-전남 송정리간의 35.5리의 공사구간을 끝으로 대전-목포간의 호남선 철도 부설공사를 완료했었다. 군산선은 호남선 철도의 부설공사 당시 군산지역 공사라는 이름으로 함께 계획되어 호남선 철도와 함께 착공되었다. 철도공사에 필요한 각종 중량급 자재를 운송 보급하는데 있어서 어려움을 지적하여 군산항을 통한 해운과 단거리 수송의 이점을 주장하면서 군산지선철도공사를 선행시키도록 했다. 현재 익산 우체국은 1923년 건립하여 사용해 오던 청사건물이 낡아 이를 철거하고 그 자리의 대지 927평에 연건평 613,3평의 현대식 2층 청사를 1979년 12월 31일에 준공하였다. 예전 건물은 붉은 벽돌로 쌓은 서양식 아담한 공관건물이었는데 역사와 함께 사라지고 현대식으로 지어진 것이다. 익산국악원은 일제시대에는 우리의 전통음악을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국악을 관장하는 주체조차 없었기에 익산의 국악 활동도 침체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해방이 되자 서울에서는 국립국악원이 생겼는데 이리에서도 1954년 초에 뒤늦게나마 평소에 국악에 관심이 많고 조예가 깊었던 강전상 선생이 주도하여 소산영, 김형규 외 15명의 동지로부터 찬조금 모아 당시의 기금 17만환으로 중앙동에 기와집 3칸을 사들여 국악원을 창립하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이후 국악원은 명실공히 익산국악발전의 산실로써 커다란 업적을 쌓게 되었다. 이 후 많은 국악인을 배출하였는데 그 중 오정숙 명창을 첫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다. 익산국악협회와 익산국악원은 익산이 낳은 국창 정정렬선생의 문화인물 지정을 기념하고 그 업적을 추모하기 위하여 2005년 9월 솜리문화회관 경내에 기념비를 세웠다. 그러나 예향인 전라도 익산의 국악원의 건물이 지나칠 때마다 잠깐 기웃거려 보노라면 너무도 외진 곳에 협소하게 자리하고 있어 원생들을 지도하는 국악연수기관으로나 익산시의 국악행정의 사무실로는 누추하기 짝이 없어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다. 역세권 중앙지 살리기사업 추진중 익산시는 KTX 익산역세권을 개발하고 광역교통체계를 개선하여 기업하기 좋은 교통물류도시로서 입지를 강화해 나갈 계획이다. KTX 익산역사 건설공사는 2,233억원의 사업비가 투자되며 올해 6월에 착수하여 2013년 10월에 완공될 예정이다. 2012년 여수세계엑스포로 인해 이 사업은 더욱 앞당겨 질것으로 보인다. 현재 중앙지하차도는 차도전용 4차선으로 확장하게 된다. 특히, 480억 규모의 서부진입로 확장사업이 국가사업으로 확정되어 올해부터 실시설계에 들어가게 된다. 익산시의 최대 역점사업인 KTX익산역 주변 역세권개발사업은 대한주택공사에서 기본수요분석을 마무리하고 사업시행을 위한 개발계획을 진행하고 있다. 지난해 11월 익산시는 대한주택공사와 익산평화주거환경개선사업 시행협약을 체결해 오는 2012년 준공을 목표로 평화동 일원에 63,700㎡면적에 공동주택 800세대를 건립하고 도로를 넓힌다. 중앙동 동장 2008년 7월에 부임했다는 유재만(57)동장은 말로만 중앙동이지 일부지역을 제외하고는 중앙지역이 무색할 정도로 허름해지는 것 같아 안타깝다 면서도 활발해지는 역세권 개발과 중앙재래시장 현대화 사업등에 활기를 찾아가는 것 같아 밝은 내일을 내다본다고 했다. 현재 창인시장이 올해완공을 목표로 지중화 및 아케이트 공사를 하고 있고, 신세대길(유타운백화점 길)의 지중화 사업도 올해 작공 할 예정이라고 한다. 또한 중앙동에서는 올해부터2012년까지 하수관거사업을 전 지역에 실시할 예정이라고 한다. 이미 재래시장 환경사업을 완공한 중앙시장은 시장 안에도 전통 테마시장으로 환경개선사업을 준비 중이라고 했다. “저의 고나내 번영회가 8개 단체가 있습니다. 재래시장 및 상점가 육성특별법에 의거하여 중소기업청에 상가와 재래시장을 등록하여 정부 지원을 받을 수 있는 방안을 추진 중에 있습니다. 중앙동관애가 날로 탈바꿈하여 시민의 발길이어갈 수 있로록 애를 쓰고 있습니다.” 중앙동자치센터는 댄스, 한국무용, 기공체조반등이 있는데 이 지역은 상가지역이라 주민들이 많지 않아 과목이 비교적 적다며 내년에 민요반을 신설계획으로 내부수리를 진행하고 있다고 했다. 한편 구 익산경찰서 자리활용방안에 대해서는 이미 시청에서 “비수급 빈곤층 차상위계층 및 위기가구를 위한[뾰로롱 나눔마켓]을 설치하고자 추진위원회를 구성 중에 있다고 했다. 이 사업은 잉여식품 또는 중고 상품 기탁업체나 개인을 최대한 발굴하고 보호가구를 찾아내 적극 보호하는 체계로 전한하여 위기상황을 해소하고 구 시가지로 인구 이동을 꾀하여 시가지를 활성화 하고자 하는 것이 시청의 추진 개요라고 했다. |